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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74>] 여론조작


입력 2023.01.13 15:58 수정 2023.01.13 15:58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74화 여론조작


금주성 의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자 이철백과 안면이 있는, 전화 끊은 당직자가 앞으로 나섰다.


“동지의 그 기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우리는 국민의 여론을 무기로 삼고 싸워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추석연휴가 눈앞이라 여론지형이 무척 안 좋습니다. 의원님 말씀은, 그래서 고향에 가서 여론전을 펼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큰 싸움을 위해서 지금은 잠시 참아야 합니다.”


전화 끊은 당직자가 노련한 연사처럼 차분하게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고 이철백도 구면의 당직자가 말하자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언론에서는 김석규의 구속을 헤드라인으로 취급하며 여론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야당이 귀성해서 고향 사람들에게 일대일 대면 여론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정부여당은 언론을 통해 무차별 여론폭격을 가했다. 아예 추석을 지내고 나면 김석규에 대한 동정여론을 말살시키려는 듯 언론의 십자포화는 무자비했다.


‘김석규, 순수한 시민운동가의 모습은 아닌 듯’

‘국가가 무슨 필요 있는가, 격앙된 김석규’

‘국가는 국민을 술꾼으로 만드는 악덕 기업주’

‘국가가 국민을 술독에 빠뜨렸다’

‘금주운동, 불순세력 개입으로 금주투쟁 전환’

‘금주투쟁의 구심 김석규, 북과 교감 나눴나’

‘익명의 탈북자, 북에서도 금주투쟁지지’

‘금주투쟁본부, 종북세력 발호의 전초기지’

‘김석규, 이적혐의 국보법 넘어 내란선동까지?’

‘내란선동 목적의 금주투쟁, 무엇을 노렸나’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내며 언론은 김석규를 위험인물로 색칠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북한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가 신문과 방송은 물론 인터넷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무차별적인 공세에 김석규는 점점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인물로 낙인 찍혀갔다. 고향에 내려가서 여론전을 펼쳐 공세를 이어가려는 야당의 기대와 달리 추석 연휴 동안 김석규에 대한 마타도어가 오히려 확산되는 것 같았다.


“원래 술 처먹으면 개였다며?”


“개만 되었다면 다행이게? 정신병자였대. 거 뭐라더라, 알코올중독보다 심한 거 말야.”


“그런 놈이 금주운동? 개가 똥을 참는 운동이나 해라지.”


“아니, 술 안 처먹으려면 지 혼자 안 처먹으면 되지. 무슨 국가가 국민에게 술 처먹이고 있다고 선동이나 하고 말야. 아주 나쁜 놈일세. 국가가 할 일 없어 국민에게 술 먹으라고 권한단 말야? 혹시 간첩 아냐?”


“북에서도 지지한다고 하는 걸 봐선 간첩이 맞는 거 같애. 아마 공작금도 수월찮게 받았을 걸?”


“아주 북으로 보내버려, 그런 놈! 아니, 아니. 사형 시켜야 돼.”


“옛날 같으면 사형 되고도 남았지. 어디 국가에 대고 욕을 해.”


추석이 지나자 여론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김석규는 북에서 보낸 거물급 간첩으로 둔갑되어 있었고 검찰에선 내란선동 혐의 적용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는 미확인 보도가 흘러나왔다. 금주투쟁본부는 정부여당과 검경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초법적이고 황당한 법 적용을 당장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하지만 언론과 당국에서는 오히려 야당과 시민사회가 범죄자를 옹호하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며 호통을 쳐댔다.


이윽고 정부여당과 언론의 무자비한 마타도어가 효과를 봐서인지 금주투쟁본부에서 발을 빼는 시민사회단체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추석 이후 처음 개최된 대정부 규탄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연휴가 끝나고 성사된 첫 집회가 예상과 달리 무기력하게 끝나자 정부여당의 여론전엔 힘이 실렸고 야당 내에선 금주투쟁을 철회하자는 의견이 비등해졌다.


야당 지도부는 서로 헐뜯고 공격하는 분열 양상의 당을 추스른다는 명분으로 금주투쟁 찬반을 묻는 의원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신상발언을 요청한 금주투쟁본부장 금주성 의원이 김석규가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 배신을 하는 것은 공당의 도리가 아니라며 지속적인 투쟁을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투쟁 피로감과 언론의 비난여론에 지친 대다수 의원들은 무기명 찬반투표에서 거침없이 반대표를 던졌다.


결국 야당은 금주투쟁을 철회하기로 결정했고 금주성 의원은 무한한 책임감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낀다며 휴대폰을 끄고 잠적해 버렸다.


“진짜 해도 너무 한다. 그렇게 의리가 없어?”


이철백은 블랙&화이트에서 야당이 금주투쟁을 철회하기로 했다는 TV뉴스를 보고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반문했다. 의리란 게 무엇인가.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금주운동가인 김석규를 정치투쟁의 일환인 금주투쟁으로 끌어당겼으면 최소한 배신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철백은 당장 금주성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금주성 의원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보좌관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며 궁색하게 전화를 끊었다.


“당장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임봉식이 퇴근하자마자 이철백을 찾아와 말했다.


“금주투쟁본부가 해체된 마당에 어디 기댈 데가 있어야지.”


“야당이라도 찾아가야지.”


“거긴 아무 도움 안 돼.”


이철백은 조금 전 보좌관과 통화한 내용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임봉식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옥 씨는 어떡하고 있냐?”


“입장이 난처해. 위에선 은근히 압박을 넣지, 석규는 또 저렇게 갇혀 있지. 게다가 듣도 보도 못한 국보법이라니.”


“국보법에다가 내란선동혐의까지 덮어씌운단다.”


“휴, 이거 왜 이렇게 꼬이지?”


“시범케이스 아니겠냐? 누구든 국가에 대들면 개박살 난다는 거.”


“미옥 씨는 잘 있어요?”


주방에서 간단한 안주를 챙겨 나온 방선희가 임봉식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명퇴를 하느냐 마느냐 고민 중인 거 같아요.”


“아직 십년 이상은 남았을 텐데 벌써 명퇴라뇨?”


“압박이 은근히 심한가 봐요”


“석규 씨 저렇게 되었는데, 미옥 씨까지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럼 선희 씨가 전화 한번 해봐. 지금 나올 수 있으면 여기로 오라고.”


방선희의 걱정스런 얼굴을 지켜보던 이철백이 말했다.


하지만 잠시 후 블랙&화이트의 문이 열리며 떡하니 나타난 건 박미옥이 아니라 술에 떡이 되어 얼굴이 빨간 고무대야처럼 변한 한종탁이었다. 낮부터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 벌겋다 못해 거무스름한 빛을 띠는 칙칙한 얼굴이었다.


ⓒ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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