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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78>] 음모


입력 2023.01.27 14:01 수정 2023.01.27 14:01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78화 음모


이틀 전이었다. 배석인은 청와대 행정관 김우환의 전화를 받았다. 김우환은 배석인보다 너덧 살 아래였지만 말투가 친구 대하듯 스스럼이 없었다. 배석인은 처음엔 그게 불만이었지만 청와대라는 든든한 뒷배를 가진 김우환에게 대놓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정말 친구인 것처럼 서로 간에 격의 없이 자연스러워지고 말았다.


“배형. 김석규 이제 꼬리 내렸지?”


김우환의 말에 배석인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다. 아직 강동욱에게 보고 받은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우환은 김석규가 수감된 교도소장에게서 받은 보고라며 김석규의 근황을 말해주었다.


“그만하면 혼도 날만큼 났고 적당한 시기에 석방할 일만 남았군.”


배석인이 말했다. 배석인은 사실 법률가의 양심으로 김석규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강동욱을 시켜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긴급체포해서 국보법 위반과 내란선동은 물론 간첩혐의까지 적용시키면서 내심 이래도 되나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김우환의 지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김우환은 청와대에 비협조적인 검찰총장의 과거 불륜을 약점으로 잡아 낙마시킬 만큼 힘깨나 있는 인물이었다.


“배형은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개가 꼬리를 내렸다고 방심하면 안 돼. 돌아서면 바로 발목을 물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김우환이 훈계하듯 말했다. 배석인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꼬리 내린 개라도 확실하게 밟아주어야 두 번 다시 주인을 무는 일이 없어.”


김우환의 목소리가 금속성(金屬聲)처럼 날카롭게 들려왔다. 배석인은 눈을 질끈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례적으로 석식을 마친 늦은 시간에 교도관의 호출을 받고 김석규는 검찰청사로 향했다. 지난 번 강동욱 검사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이후 일주일만의 소환이었다. 김석규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왜 그런 혐의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결정은 자신의 몫이었고 아무도 자신의 무죄를 지지해줄 응원군은 없었다.


“많이 힘드시죠?”


강동욱이 상냥한 얼굴로 김석규를 맞이했다. 강동욱은 평소처럼 철제의자에 김석규를 앉히지 않고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지난 번 그렇게 말해놓고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알고 보니까 제 대학 선배님이시더라고요. 물론 학부는 다르지만요.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챙겨드리지 못했네요. 너무 공명심에만 매몰되다 보니 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강동욱이 머리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김석규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이제껏 멧돼지처럼 매섭게 몰아붙이던 강동욱이 먼저 머리를 숙이며 들어오는 게 뭔가 이상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마운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이제껏 우군이 모두 떠나간 상태에서 자신을 담당한 검사가 선배 대접을 하며 사과를 해오는 게 기분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울컥,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선배님의 혐의가 명백하다 해도 제가 너무 매정하게 대해드린 것 같습니다.”


“검사님. 정말 저는 억울합니다. 제가 국보법 위반을 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검사님도 잘 좀 생각해 보세요.”


강동욱이 부드럽게 나오자 김석규는 문득 애원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그러자 강동욱이 동의한다는 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김석규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선배님. 다시 한 번 잘 검토해 보겠습니다. 우선 담배 한 대 태우세요.”


강동욱이 담배를 꺼내 김석규에게 건넸다. 김석규는 담배 끊은 지 십년도 넘었다며 거절하려다가 강동욱의 성의가 고마워서 그냥 담배를 받아들었다. 강동욱이 담뱃불을 붙여주고 자신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검사님, 다시 한 번 검토해서 선처해 주세요. 대학 동문이라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담배를 빨아대는 김석규의 얼굴에 언뜻 비굴한 기색이 스쳐갔다. 강동욱은 내색하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사실 제 선에서 말씀드리긴 곤란하고요. 부장검사님이 우리 대학 선배님이십니다. 아마 김 선배님보다 서너 해 위이실텐데요. 아시다시피 우리 대학이 서울에서 삼류 취급받다보니 서러움이 많아서 선후배간 정과 의리가 다른 대학보다 유난히 돈독합니다. 그러니까 잠시 후에 만나 뵙고 직접 말씀 드리세요.”


강동욱이 담배를 끄고 김석규에게 사복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유했다.


청사 지하 주차장에 검정색 대형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고 수사관인 듯 보이는 건장한 남자 둘이 차량 밖에 서 있다가 허리를 꾹 접어 강동욱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그 중 하나는 얼핏 보기에 안면이 많았는데 놀랍게도 강주경찰서 민완구 과장이었다. 민완구는 강동욱의 요청으로 며칠 전 중앙지검에 파견 나와 있었다.


“김 팀장님 고생 많으시죠?”


민완구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김석규는 아무 말 없이 민완구의 손을 잡았다. 낯선 장소에서 맞닥뜨린 민완구의 갑작스런 등장은 반가움보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민완구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자 김석규는 문득 울컥하는 감정을 가졌다.


검정 세단은 네온사인이 휘황한 서울 거리를 한동안 달렸다. 구속된 이후로 처음 보는 화려한 광경이었다. 김석규는 목적지가 어딘지 물어보려다가 혹시 강동욱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아닐까 괜히 염려되어 입을 닫고 있었다. 김석규는 시나브로 덫에 걸린 짐승처럼 무척 나약하고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나마 민완구가 곁에 있어 조금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검정 세단은 빌딩숲 한가운데 위치한 어느 마천루의 지하로 내려갔다. 주차장에 세단을 세워 두고 일행은 붉은 카펫이 깔린 드넓은 복도를 걸어갔다. 그들은 복도 끝에 다다라 양각 문양이 새겨진 육중한 나무문 하나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담인 듯 보이는 중년의 아리따운 여성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일행을 맞이했다. 강동욱은 수사관들을 밖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하고 김석규와 함께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 안에는 양주와 안주 일체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곧 부장검사님 오실 겁니다.”


김석규의 귓가에 대고 강동욱이 조용히 속삭였다. 김석규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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