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첨단혁신
해상에선 더 거대한 규모로 진행중
‘바다의 승자=세계의 승자’ 공식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은 칼 세이건이 지구에 붙여준 별칭이다. 1977년 발사됐던 무인탐사선 보이저 1호가 기나긴 항해 끝에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 카메라 앵글을 돌려 마지막으로 촬영한 지구 모습이 바로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우주 먼지나 다름없는 작고 연약한 지구는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 때문에 아름다운 푸른빛을 띤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의 이름도 지구(地球)보다 수구(水球)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많다.
바다는 태초부터 모든 지구 생명체의 요람이었고, 특히 인류에겐 언제나 꿈과 희망, 공포와 절망이 혼재하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악한 호모사피엔스들은 거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바다를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고 망망대해를 향해 끝없는 도전을 이어왔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부터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신기원의 무대는 늘 바다였다.
그리고 그 바다의 중요성은 4차 산업혁명의 첨단기술이 난무하는 오늘날에도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등장하고 드론이 날아다니는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바다에서는 육상에서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일상에서 접하지 못하는 먼 곳의 일이라 생소하게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바다의 패권을 움켜쥐려는 국가 간의 경쟁과 갈망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바다에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일단 우리가 땅위에서 목격하고 있는 거의 모든 혁신이 바다에선 훨씬 거대하고 신속하고 정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가령 자율운행 기술을 본다면 자동차와 선박은 우선 스케일부터 비교가 안 된다. 한화오션이 10년 전 만든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은 길이가 400m에 이른다. 이 배를 세로로 세워놓으면 여의도 63빌딩보다 150m나 키가 크다. 만들어달라는 주문만 있으면 123층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내려다보는 크기의 배를 만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무지막지한 초대형 선박이 선원도 없이 나 홀로 돌아다니기 시작한다면 땅위의 자율주행 자동차는 어린애들 장난감처럼 느껴질 것이다. 다만 덩치가 크면 클수록 만일의 상황에 더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온갖 최첨단 정밀기술이 동원되고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사전 연구들이 이미 최종단계에 도달해있다.
요즘 세간의 화두인 친환경 이슈도 마찬가지다. 기후온난화를 얘기할 때 육지온도가 평균 1℃만큼 올라가면 ‘매우 심각한 일’이지만 바다온도가 1℃ 더 올라간다면 이건 지구 종말과 다름없는 재앙이다. 히로시마 핵폭탄 수 천만 개 급의 열에너지가 빙하를 녹이면 매력적인 라틴 여가수 카밀라의 ‘하바나 온난화’ 패러디를 즐길 여유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전설 속 아틀란티스 섬처럼 다들 물속으로 가라앉거나 케빈 코스트너의 ‘워터월드’처럼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신세가 될 테니까. 환경보호 분야를 꼭 육해공으로 나눌 이유는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해양의 친환경 기술개발이 그만큼 중대하다는 뜻이다.
군사 분야에서는 더 치열하다. 현대전에서 국방력의 척도는 해군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잠수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해상에 떠다니는 항공모함부터 구축함, 호위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일반인의 상상력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첨단혁신들이 동시다발로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톰 크루즈가 주연한 ‘탑건’의 매버릭도 공군이 아니라 해군소속이라는 사실을 군사 분야에 조금만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바다의 왕자가 곧 세상의 왕자라는 공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유효하다.
21세기는 여러 의미로 새로운 해양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 실생활과 다소 거리가 있어 피부로 체감하지는 못해도 바다에서 벌어지는 혁명적 변화는 이제 허황한 공상의 영역이 아니라 명백하고 현존하는 실제상황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한국의 첨단 조선업이 자리 잡고 있다.
글/이동주 한화오션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