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간다’. 칸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유수의 세계영화제들이 감독 김성훈을 부른 그 영화의 제목이 아니다. 배우 김윤석이 연기한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공통점이다.
그런 캐릭터들을 골랐거나 러브콜을 받았겠지, 만은 아니다. 어떤 역이든 김윤석이 빚어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가 인물에 심어진다. 그러한 인물에 어울리기도 하고 잘해 내기도 하는데,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 연기력이라 불리는 배우라 해도 순전히 연기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베우 이전에 인간 김윤석이 지닌 내면의 색과 결에 그 의지가 내재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작품들을 돌아보면 얘기가 쉬워진다. 김윤석은 영화 ‘추격자’(감독 나홍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악마성을 동시에 지닌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 분)을 끝까지 추격한다. 선해서, 정의로워서…와는 다르다. 김윤석의 표현을 빌리면,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날따라 유난히 눈길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또 보다 보면 한 번은 일으켜 세워줄 정도의 인간성을 지닌 엄중호지만, 자신의 돈벌이 수족으로 부리는 김미진(서영희 분)을 잡아간 놈이라 믿기에 지영민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비리로 잘린 것도 모자라 포주 노릇을 하는 악질 전직 경찰이지만, 거친 현장에서 단련된 형사이기에 지영민을 좇는 데는 제격이다. 멈추고 포기하는 법이 없다. 달리고 또 달려, 달려들고 또 달려드는 게 엄중호다.
영화 ‘극비수사’(감독 곽경택)에서는 유괴된 아이를 구하려는 형사 공길용으로 분했다. 모두가 범인 잡기에 혈안이 돼 있을 때, 공길용은 살아있는 아이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과학적 수사를 하는 형사답게 처음에는 무속인을 믿지 않지만, 모든 상황이 도사 김중산(유해진 분)의 말대로 되어가자 ‘어떤 경우에도 아이가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아이가 분명 살아 있다”고 말하는 중산의 손을 잡는다. 아이가 유괴된 부모라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사건을 맡기고 싶을 만큼, 공길용은 진심과 노력을 다해 아이 구하기에 매진한다.
영화 ‘암수살인’(감독 김태균)에서도 형사인데, 시신을 찾지 못한 ‘암수살인’ 해결에 목숨 거는 김형민을 맡았다. 고과나 승진을 중시한다면 눈길 주기 어려운 미제사건, 그것도 시신조차 없어 범인을 특정하기도 어렵고 잡는다 해도 벌하기 어려운 암수사건에 집중하는 것만 봐도 사람을 우선하는 김형민의 가치관이 읽힌다.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연쇄살인마 강태오(주지훈 분)의 말에서 진의를 느낀 김형민은 주도권을 뺏겼다 찾았다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 시신 찾기에 여념이 없다. 죽어서도 눈 못 감고 있을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심경을 생각해 시신이라도 찾아 주기 위해 태오와의 위험한 거래를 이어간다. 암수살인의 해를 입은 이라면 누구라도 의지하고 싶은 김형민이다.
그 밖에도 영화 ‘황해’(감독 나홍진)에서는 김구남(하정우 분)의 뼈를 추리겠다고 중국 옌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살인청부업자 면정학으로 분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공포를 몰고 다닌다. ‘거북이 달린다’에서도 탈주범 송기태(정경호 분)에게 일확천금을 뺏기고 스타일 구긴 형사 조필성을 맡아, 느릿느릿 거북이 같은 시골 형사의 자존심을 걸고 좌충우돌 추격전을 벌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거북이도 토끼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도둑들’(감독 최동훈)에서는 전설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치러 홍콩에서 만난 한국과 중국의 도둑 10인 팀의 수장 마카오 박으로 등장한다. 이 거대한 글로벌 프로젝트는 사실,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일생을 건 복수극이었고, 끝내 해낸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을 분노, 인생에는 돈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원수 웨이홍뿐 아니라 각자의 속셈으로 ‘홍콩 프로젝트’에 참여한 도둑들에게 깨우친다.
꺾일 줄 모르는 강한 의지, 그가 결심하면 끝내 해내리라는 기대와 믿음이 가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영화를 순항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다소 부족한 개연성도 인물의 특성이 메우고, 멈춰선 이야기도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시나리오에서 캐릭터에 아무리 그 힘을 부여했다 해도 인물을 맡은 배우가 그것을 소화하고 표현하고 관객을 설득해 믿음을 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것을 해내 왔고, 관객이 그렇게 믿고 있는 배우가 바로 김윤석이다.
그런 김윤석에게 안성맞춤인 캐릭터가 탄생했고, 다행히 혹은 당연히 김윤석에게 맡겨졌다. 영화 ‘모가디슈’(감독 류승완, 제작 덱스터스튜디오·㈜외유내강,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주인공, 주 소말리아 한국대사 한신성이다. 1991년을 배경으로, 한국의 UN 가입 찬성표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대사관을 열었다가 내전이 발발하자 가족 같은 직원과 부인을 데리고 탈출한 실화를 그린 영화에서 김윤석은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한신성호’의 선장 역을 맡았다.
류승완 감독은 한신성을 초능력 슈퍼히어로로 구상하지 않았다. 총 하나 변변히 없는 외교공무원인 그가 서른 명 가까운 인원을 탈출시키는 힘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절절한 희망과 물러설 수 없는 의지에서 나온다. 희망과 의지가 꺾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한신성은 내 직원, 내 가족, 내게 온 사람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총탄이 쏟아지는 거리를 누빈다. 실낱같은 희망만 있다면 자존심 내려놓고 무슨 방법이든 동원하고 헤쳐 나가는 모습에서 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고 애쓰는 부모의 모습이 겹친다. ‘부성애’, 아버지 한신성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을 온전히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감동적이다, 신파 없는 순전한 감동이다.
김윤석은 지난 26일 언론과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로 돌려지는 공을 류승완 감독, 함께한 배우 모두와 나눴다.
“능력 있는 사람의 탈출기가 아니에요. 오지에 떨어진 대사, 참사관, 사무원이 무력전이 벌어지는 전쟁터를 무기를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힘으로 탈출한다는 것에 ‘모가디슈’의 매력이 있습니다.”
“인물마다, 배우마다 자기 역할이 있는 영화예요, 그만큼 앙상블이 중요했는데. 내가 나서야 할 때가 있고 상대가 할 때 바라봐야 하는 때가 있는데, 나서야 할 때 나서고 바라봐야 할 때 바라보고…그걸 기막히게 자연스럽게 지키며 협업했어요. 그게 이 영화 작업의 최고 매력입니다.”
한신성이라는 캐릭터의 정의로움과 강한 의지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낼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정의로움에 대해서는 경계했고 설득력 있는 인물이 된 배경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을 돌려줬다.
“이 캐릭터는 여느 영화에서 맡았던 캐릭터와 달랐어요. 인간 김윤석의 모습이 반쯤 반영돼 있어요. 때로는 의지가 보이고… 정의보다는 최대한 주어진 상황 안에서 선택하는, 능력보다는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선택하는 인간적 모습이 관객분들께 전해지길 바라며 연기했어요. 덕분에 즐겁게 찍었습니다.”
“공감대죠, 관객께서 저를 평범한 옆집 아저씨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내가 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감하며 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기했습니다. 한신성은 육체적 능력은 일반 사람보다 못한 사람일 수 있어요. 영어 대사 같은 경우만 봐도, 여행 자유화 시절이 아니기에 독학이나 참고서로 배운 영어, 문법을 더 중시했던 시대에 배운 ‘성문종합영어 세대’의 영어로 유창하지 않죠. 굴리는 게 아니라 따박따박 하는 발음하는 영어 정도의 그런 평범한 사람이 탈출을 도모하는 영화인 겁니다.”
배우 김윤석이 참여한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 하모니가 좋다, 주연인 자신조차 혼자 빛나려 하지 않는다. 감독과 함께 작품의 완성도를 고민하는 배우, 이번에도 실망은 없을까. “류승완 감독이 배우들에게 공동작업자, 우리는 한 식구라는 믿음을 줬다”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모가디슈’를 상영하는 극장이 더운 여름 좋은 피서지가 되면 좋겠다고.
“관객이 주시는 기대, 김윤석이라는 이름에 걸린 부담감은 언제나 있어요. 떨치는 방법은 작품에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 (다시 한번 중요도 순서를 선명히 하며) 캐릭터보다는 작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나온 작품이 여러분께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며 연기하고 있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