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영화 속 명대사가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눈을 뜨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생각한다. 내가 꿈을 꿨던가? 무슨 꿈이었지? 신기하게도 눈 뜨자마자 기억나지 않았던 꿈도 곰곰이 더듬다 보면 장면이 떠오르고 때론 줄거리까지 생각난다. 영 생각이 나지 않으면, 개운하게 잘 잤네!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도저히 몸을 일으키기 힘들 때가 있다, 악몽을 꿨을 때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을 밤새(실제로는 짧은 시간이겠지만 느낌에는) 체험하고 난 때다. 손에 신발을 들고 분명 발목까지 차는 시냇물을 맨발로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3m 깊이의 수영장이 돼서 깊은 물에 갇힌 채 버둥댄다.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수영도 못하고 호흡도 짧다. 정말 죽을 것 같다.
꿈속에서 한 번, 깨어나 꿈을 곱씹으며 다시 한번 죽을 것 같다. 혼자 분석한 결과는^^ 물에 대한 공포는 두 가지 기억에 근거한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무렵, 냇가에서 수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빨라진 유속에 늘어난 유량에 놀랄 틈도 없이 물이 강처럼 변했고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렇게 죽는 건가, 살려는 발버둥보다 체념이 커지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발끝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함께 놀러 간 초등학교 4학년 옆집 동생이었다. 누군가 내 상황을 알고 있다는 안도감과 기쁨도 잠시, 과연 키가 한참 작은 친구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에 머리가 닿고 이러다 저 동생마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 마음이 닿았다.
구했다! 그 동생이 나를 구했고, 우리를 구했다. 혼자 생각에 빠져 놀고 있느라 몰랐는데, 그 동생도 수영하고 있었고 맥없이 떠내려가는 나를 헤엄쳐와서 잡았단다. 그때 내가 한 것이라고는 절대 저 친구를 꽉 잡거나 머리를 눌러 내가 더 숨 쉬려고 하면 둘 다 죽는다는 것이었고 온몸에 힘을 빼는 거였다. 다부지고 당찬 생명의 은인 덕에 살았고, 냇가 수영은 그때가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기억은 대학교 1학년 때다. 1학기 체육 수업이 수영이었다. 물이라면 정말 무서운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 교양이었다. 하필 잠수부터 배웠다. 강사가 배치기를 했다간 장 파열이 될지도 모른다며 사선으로 입수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수영도 못하면서 그건 또 가르치는 대로 해서 그만 수영장 바닥을 손으로 찍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해도 수영장 천장의 빛이 보이지 않고 수면에 다다르지 않았다. 최고 3m 깊이의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았다. 30여 명의 학생 가운데 하나가 한참 물을 들이켜고 있었지만, 너무 물속에 있었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누군가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함께 수영 수업을 듣는 과 학우였다.
“선생님, 저기요!”
“아, 장대 뻗어 줘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안도감을 주었다. 아, 별일 아니구나, 이렇게 죽지는 않는구나. 생명줄 같은 장대를 잡고 물속에서 공기 속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한동안 누워 있었다. 일어날 수 없었다. 관찰력 좋고 두루 살필 줄 아는 친구 덕분에 살았고 그날의 수영 수업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1학기 수영 수업은 계속됐다. 본래는 주 1회였지만 때로 주 2회 가야 하는 때도 있었다. 천근만근의 추를 온몸에 달고 다시 수영장으로 갔다.
“꿈속에서 싫은 일을 다시 겪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 아세요? 꿈속에서라도 좋은 일만 일어나면 좋겠다고요.”
진절머리가 나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얘기하는 여자 손님을 달러구트가 나서서 부드럽게 달래기 시작했다.
“정말 싫은 기억이기만 할까요?”
이미예 작가의 판타지 소설 ‘달러구크 꿈 백화점’에 나오는 대목이다. 꼭 내가 소설 속에 들어가 손님이 된 듯한 대사다.
정말 싫은 기억이기만 하느냐는 질문에 머리통을 한 대 맞고, 마음엔 불이 타올랐다. 불쾌를 넘어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공포의 순간을 다시 겪는 힘겨움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서 치밀어오른 분노였다.
그때, 머리에서 ‘띠링’ 벨이 울렸다. 잠시 책을 내려놓았다. 책의 딱 절반쯤에서 만난 장면.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 순간 앞에서, 책 안의 어떤 사연보다 ‘아, 이 부분은 공감하는 이가 정말 많겠구나’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악몽 한번 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과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공포의 무엇(그것이 대상이든 경험이든)이 하나 이상은 있을 터이니 말이다.
소제목을 다시 봤다. ‘트라우마 환불 요청’.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인생에 트라우마를 남긴 순간을 꿈으로 자꾸만 맞닥뜨리게 된 사람들이 그 꿈을 판 ‘달러우트 꿈 백화점’에 항의하고, ‘시간의 현인’의 후손이자 백화점 주인인 달러우트가 그들을 설득하는 대목. 꿈에 관해 얘기하는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라는 데 동의하자, 과연 이미예 작가가 달러구트의 입을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해졌다.
반복해서 물에 휩싸이는 꿈을 꾸는 배경은 대략 알겠는데, 이 꿈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혹은 어떻게 하면 더 이상 꾸지 않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이 무척 알고 싶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엔 달러구트가 질문하고, 백화점의 신입사원이자 책의 주인공인 페니가 배우고 느낀 대로 답하는 것으로 작가는 다시 한번 결코 유쾌할 수 없는 꿈, 선몽이 아닌 악몽의 필요 이유를 전한다.
“페니, 좋은 꿈과 그저 그런 꿈의 차이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고 있니?”
“글쎄요. 달러구트 님이 말씀해 주셨던 것 같은데….”
“항상 꿈의 가치는 손님에게 달려 있다고 하셨는데…. 아하, 그렇군요. 손님이 직접 깨닫느냐 마느냐의 차이예요. 직접 알려주는 것보다 손님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꿈이 좋은 꿈이에요.”
“그렇지. 과거의 어렵고 힘든 일 뒤에는, 그걸 이겨냈던 자신의 모습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우린 그걸 스스로 상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단다.”
“네, 저희가 꿈을 파는 이유가 거기 있죠. 결국 모든 건 손님들에게 달린 거니까요. 제 말 맞죠?”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힘겨웠던 일, 그 이면에는 그것을 이겨낸 자신이 있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은 그것을 현실로 또 맞닥뜨리지 않고 꿈으로 겪고 있다.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하고, 나는 또 그것을 겪어내며 단단해진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트라우마로 사라질 수 있고, 더 이상 똑같은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다.
판타지 소설답게 명쾌하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을 읽노라니 마음이 밝아진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7월 발간된 1권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있고, 1년 만에 나온 2권은 8월 들어 2주째 1위를 달리고 있다. 영화 속 명대사를 소개하는 평소와 달리 소설 속 명대사를 전한 기사가 아무래도 부족하게 느껴졌다면, 1%도 안 되는 책 내용에 궁금증만 더 커졌다면 직접 읽어 보자. 만인의 지성을 믿는다, 여러 사람이 읽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