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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입력 2017.12.03 05:39 수정 2017.12.03 05:40        황태순 = 정치평론가

<칼럼> 한때는 ‘선거의 여왕’으로

지금은 차가운 감방에서 영어의 몸으로

지난 8월 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제59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자료사진) ⓒ사진공동취재단

1일 고건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공인의 길’을 내놨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을 통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고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정말 답답했다. 오만·불통·무능했다. 아버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 한다. 대통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혹평했다.

과연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으며, 지금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또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박정희는 점점 기억의 뒤안길로 접어들면서 그 시대와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박근혜는 지금도 모진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현대사에 어떤 의미인지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무덤 속 박정희를 꺼낸 것은 YS정부의 무능

사람들의 막연한 추측과 달리 전두환·노태우 시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나 추념의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김영삼(YS)정권에서도 박정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97년 2월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켰다. 복제가 핫이슈였다. 그해 3월 고대신문은 고려대 재학생 180명을 대상으로 주관식 설문조사를 한다. ‘복제하고 싶은 인물’로 김구 선생(13표), 테레사수녀(7표)에 이어 박정희(6표)는 3위를 기록한다.

박정희 신드롬의 출발이었다. YS정권 4년 동안 안보와 경제 정책에 난맥상이 겹치고, 대통령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부정부패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특히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되고, 삼미·진로 등 대기업 중견기업 할 것 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한때는 독재자라고 돌아보지도 않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2월 16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을 하는 모습. (자료사진) ⓒ데일리안

박근혜를 끌어낸 것도 그 시대의 흐름

1997년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50년 동안 집권 중이던 보수정당 민자당(그해 한나라당의 개칭)의 후보는 ‘대쪽’ 이회창이었다. 상대방은 3전4기를 노리는 산전수전 다 겪은 김대중(DJ)이었다. 처음에는 이회창의 승리가 무난해 보였다. 하지만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은 치명적이었다. 경선에서 2위를 했던 이인제 경기지사가 경선에 불복하고 탈당했다. 이인제는 가는 곳마다 자신은 키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163센티미터라면서 박정희 신드롬에 올라탔다.

DJ는 5·16쿠데타의 주역인 ‘유신본당’ 자민련 김종필(JP)총재와 DJP 연대를 성공시켰다. 보수 세력은 민자당(이회창), 국민신당(이인제) 그리고 DJ를 돕는 자민련(JP)으로 세 조각이 났다. 이때 이회창 쪽에서 구원투수로 불러들인 인물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인 박근혜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당시 18년 째 칩거 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우리나라가 경제난국에 처한 것을 보고 아버님 생각에 목이 멜 때가 있다”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한때는 ‘선거의 여왕’으로

지난 8월 회고록을 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기억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다른 의원들과 섞이지 않고 홀로 움직이면서도 당내 민주화나 개혁 같은 주제를 선점해 당내 입지와 존재감을 키우는 독특한 행동을 보였다”고 했다. 또 “(2004년) 천막당사로 옮겨 당의 재기를 이루는 것을 보고 내 결정(박 전 대통령의 영입)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즉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인 박근혜는 침착하면서도 강단 있는 꽤 괜찮은 정치인이었다는 말이다.

한나라당의 당대표가 된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 노무현 정권과의 투쟁도 강단 있게 밀어붙였다. 2005년 12월 노무현 정부는 사학법을 개정했다. 그러자 박근혜는 한 겨울에 57일 동안이나 장외투쟁을 벌이면서 이를 저지했다. 또 박근혜가 당대표로 있는 동안 있었던 모든 선거에서 노무현 정부를 압도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선거의 여왕’이다. 대연정을 제안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지금은 차가운 감방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건 전 총리와 이회창 전 총재의 기억들을 종합해서 보면, 이 세상 일들은 보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의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려던 정치인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다음 오만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추운 겨울 거리에서 장외투쟁을 하며 현직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단 칼에 자르는 강단은 대통령이 된 후 불통의 고집스러움으로 변질된 것이다. 유능한 선거의 여왕이 무능한 대통령이 된 까닭은 또 무엇일까.

국정농단의 주역이라는 최순실(정윤회), 문고리 3인방(환관)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있었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기 전과 된 후의 박근혜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 박근혜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1997년 12월 정치권에 입문하여 2012년 12월 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15년 동안 어떻게 측근들을 포함 언론인, 정치인 모두가 그렇게 감쪽같이 모를 수가 있었을까.

박정희의 아우라에 우리 모두가 현혹되었던 것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박근혜가 이명박 대통령의 친박 공천학살에 대해 했던 일갈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인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모두에게 속았던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가 자진하여 그렇게 최면을 걸었다. 박정희의 맏딸이니 오죽 잘 하겠느냐고 상상하면서 거기에 맞춘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우라는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사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완전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보수가 산업화 세력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추스르고 역사의 한 주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박근혜 시대에 대한 처절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속았다면 속았던 사람도 잘못이다. 그런 자성의 노력 없이는 지금 진보세력들이 주도하고 있는 ‘적폐청산’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는 박근혜를 박정희의 아우라에서 분리하여 시시비비를 가려줘야 한다. 지금 이런저런 노력도 없이 매주 토요일 오후 ‘문재인 타도, 박근혜 석방’의 구호를 외치면서 광화문과 시청광장 사이를 오가서는 미래가 없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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