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 연기 대충 하네.”
정말 그런 배우가 있을까. 조·단역을 포함해 대다수 배우는 ‘이번 작품을 잘해야 다음이 있다’는 마음으로 연기한다. 특히 주연배우는 잘하는 걸 넘어 ‘이번 영화가 잘돼야 다음이 있다’는 자세로 임한다. 어느 쪽이나 절박하긴 매한가지다.
‘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는 있을 수 있다. 실제론 사력을 다하지만 덤덤해 보이고, 게을러 보이고, 대충 하는 듯하게 보이는 연기.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입에서 거품 뿜으며 부모 노릇 열심히 하는 게 차라리 쉽다, 하고 싶은 말 참으며 아이를 믿고 뒷짐 쥔 척 지켜보는 일이 녹록지 않다. 배우에게 캐릭터는 자식이다, 입에서 불 뿜으며 연기하는 게 차라리 편하다. 그 정도 할 수 있는 내공은 가졌기에 배우로 살아남았고, 주연이 맡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그렇게 뜨겁게만 연기한다면, 관객인 우리는 얼마나 지루하고 피곤하겠는가.
배우들에게는 저마다의 연기 캐릭터가 있다. 다양한 배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고, 감독과 제작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그리고 배역에 걸맞은 배우를 찾는 배경이다. 연기 캐릭터는 배우이기 이전엔 인간인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여러 작품을 통해 검증된 어울리고 잘하는 연기와 소화력이 더해지고, 노력과 운에 의해 내 것이 되었던 필모그래피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다. 관객인 우리도 그 결과치를 안다. 해서, “안성맞춤 캐스팅이다” “에이, 이 배역엔 그 배욱 더 좋았지” 같은 호평과 불평을 한다.
오늘 얘기 나누고픈 배우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 캐릭터는 빵으로 치면 ‘식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라, 배우 이완 맥그리거라는 이름을 통해 떠오르는 이미지. 그는 웃고 있다. 이를 드러내놓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도 있지만 이런 표정은 여러 배우에게서 볼 수 있고, 어딘가 어정쩡하게 한쪽 입술을 슬쩍 올리고 웃는 모습은 특유의 미소다. 마찬가지로 그의 분노, 그의 슬픔도 표출하기보다는 안으로 삼킨다. 나이 들수록 더욱 그렇다.
나는 그런 배우, 이완 맥그리거가 좋다. 조절, 통제를 아는 배우다. 조절력과 통제력을 갖췄다고 해서 누구나 그처럼 연기해선 배우로서 살아남기 어렵다.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거나 대충 연기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완 맥그리거는 그래도 된다. 왜냐하면, 그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계속 지켜보게 하는 힘,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순식간에 흐르게 하는 힘,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중 배우에게 있어 매력은 연기력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오늘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를 들여다볼 영화는 ‘비기너스’(2010)이다. 인간복제에 대한 화두를 너무나 근사하게 던진 ‘아일랜드’도 있고, 대표작 ‘트레인스포팅’도 있고, ‘스타워즈’ 시리즈나 ‘물랑 루즈’ ‘빅 피쉬’ ‘영 아담’ ‘유령 작가’ ‘필립 모리스’ 같은 영화도 좋고, ‘퍼펙트 센스’에선 너무나 섹시한데, 왜 하필 ‘비기너스’인가 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아일랜드’와 선호도 1위를 놓고 다투는 영화기도 하거니와 그의 ‘식빵’ 같은 면모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화려한 장식과 내용물 없이도 얼마나 근사한 연기와 영화가 가능한지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 ‘비기너스’는 두 가지 시점의 얘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현재는 2003년이다.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일러스트 작가 올리버(이완 맥그리거 분)는 조용한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건조했던 부모님의 관계를 보며 자라 ‘나도 그렇게 될까봐’, 누군가와의 사랑에 조심스럽다. 잘될 것 같지 않으면 지레 ‘정지’ 버튼을 누르고 그 사람을 떠나거나 밀어낸다. 벌써 네 사람을 그리 했고,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난 지금,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개 아더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과거는 아빠가 살아계셨던 수년 전. 폐암 4기를 선고받은 올리버의 아빠 할(크리스토퍼 플러머 분)은 이제라도 자신의 색깔대로 살겠다고 75세에 커밍아웃을 한다. 한참 젊은 앤디(고란 비스닉 분)를 만나 행복해하며 독서모임도 하고 게이 인권을 위한 활동도 열정적으로 하는 아빠를 보는 올리버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던 엄마가 떠올라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랑에 빠진 아빠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한다. 엄마는 아빠의 성 정체성을 알고도 고쳐 주겠다며 청혼했고 아빠는 45년간 온갖 방법으로 노력해 봤지만, 제자리였다. 그러함에도 눌렀던 욕망, 아내가 떠난 뒤 6개월, 시한부 선고 앞에서 봉인을 연 것이다.
과거 시점은 회상처럼 잠깐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과 계속해서 교차 편집된다. 어른이 됐어도 여전히 삶 앞에 주저하는 올리버, 죽음을 앞에 두고 결단력 드높은 할의 대비가 선명하다. 그런 아빠를 당시엔 지켜만 봤지만 그래도 올리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번에 만나는 사랑에게는 좀 다르게 대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 올리버와 할의 일상이 공존한다면 충돌 에너지가 클 수 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숙성의 시간을 거친 후인 만큼 긍정의 에너지를 기대케 한달까.
드디어 등장한다. 올리버의 다섯 번째 연인. 친구들의 권유로 억지로 간 코스프레 파티에서 만난 아름다운 애나(멜라니 로랑 분). 한눈에 반하지만 역시나 머뭇거리는 올리버. 애나는 프랑스에서 건너와 활동하는 배우인데 올리버만큼이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다. 아니, 애나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쉴 새 없이 딸에게 전화를 걸어 ‘극단적 선택’을 입에 올린다. 사람을 믿고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쉽지 않은 애나. 애나는 집보다 호텔에서 묵는 걸 즐기는데, 아버지는 잘도 찾아내 전화한다. 애나가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세팅돼 있지 않은 ‘빈방’을 좋아해서다. 가족과 가정에 넌덜머리 난 모습이 보인다. 누구를 데려와도 자신의 배경이 드러나지 않는 장점도 있다.
처음엔 올리버와도 ‘빈방’ 같은 사랑을 나눈다. 사람과의 관계에 서툰 올리버 역시 그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 깊은 관여 없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아끼는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있고 싶다. 올리버는 애나에게 자신의 집에 들어올 것을 청하고, 두렵지만 자신도 원하고 있음을 아는 애나는 수락하는데…. 예상하듯,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영화가 아니다. 두 연인은 아직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커녕 인생에도 초보처럼 보이는 올리버, 연인을 나의 빈방을 채울 가장 중요한 무엇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애나, 두 사람은 과연 연애 초심자 코스를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소란스럽지 않다. 특히나 올리버를 연기한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는 느리고 섬세하다. 우유랑 먹어도 오렌지 주스와 먹어도 어울리고, 잼을 발라도 채소를 얹어도 맛있는 ‘삭빵’처럼 ‘비기너스’라는 식탁 위에 놓여 있고 모든 배역의 손이 그를 찾는다.
극 중 올리버는 내용상 30대 후반쯤으로 여겨지는데, 사색이 깊고 진중하면서도 너무 신중해서 인생 초보처럼 보인다. 그런 올리버를 30대 말엽의 이완 맥그리거가 표현했는데, 정말 초보처럼 보인다. 힘주어 소리칠 장면도 없고 처절하게 울거나 기뻐 날뛰는 장면도 없다. 그런 잔잔한 호수 같은 연기인데, 맨 식빵 먹는 것 같은 느낌인데 뭔가 고소한 게 자꾸만 손이 가게 한다. 앞서 말했듯이 누구나 이 조용한 연기로 관객을 주인공에게, 배우 자신에게, 영화에 붙들어 두지 못한다. 가장 평범한 연기를 잘하는 게 진짜 잘하는 것이다.
영화 ‘비기너스’는 기승전결, 힘차게 내달리지 않는다. 승이나 전 단계의 일부를 툭 떼다가 우리 앞에 놓아둔 느낌이다. 그래서 좋다. 더 우리네 현실 같고, 일상 같고, 인생 같다. 이완 맥그리거는 영화의 결을 정확히 알고, ‘비기너스’라는 산세에 꼭 맞는 ‘올리버’라는 나무를 심은 거다. 이완 맥그리거의 선택적 연기가 올리버의 캐릭터를 만들고 ‘비기너스’의 이미지가 된 것이다. 나무보다 산, 배역보다 작품을 보는 배우가 호평받아야 하는 이유다.
사실 ‘비기너스’의 모든 배우는 호평 받아 마땅하다. 캐릭터에 착 붙는 연기를 했다, 아더 역의 강아지마저. 특히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의 트랩 대령,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넘치는 에너지와 중후한 멋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할을 만들어냈다.
여담으로, 극 중에 등장하는 일러스트들은 영화를 연출한 마이크 밀스 감독이 밑그림을 그리고 이완 맥그리거가 완성했다. 카메라가 일러스트 하는 손을 가까이 잡아도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다. 감독 데뷔 전 그래픽 디자이너를 했던 마이크 밀스 감독은 이완 맥그리거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극 중에서 직접 그려 볼 것을 제안했다. 수려한 외모와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이완 맥그리거의 일러스트라니. 왓챠 등 인터넷TV에서 볼 때의 장점, 중간중간 ‘정지 버튼’을 누르고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