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단은 역시 금물이다.
지난해 가을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연출 김정식·이경식, 극본 백미경)에서 빌런 류시오 역의 변우석을 보면서 ‘준수한 외모에 목소리도 좋은데 어쩜 저렇게 뻣뻣해 보일까?’, 그 연기력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발성 연습부터 새로 해야 하는 것인가 싶을 만큼 발음이 뭉개졌고, 말의 어미와 끝 문장 처리가 한없이 지하로 갔다.
문자 그대로 책 읽듯 또박또박한 발화만 아쉬웠던 게 아니다. 캐릭터도 도와주지 않았다. 악역인데 ‘힘센 여자’ 강남순 앞에서는 한없이 여리고 약하고 모성애를 자극하다 못해 무장해제가 됐다. 아직은 설익은 연기력에 캐릭터라도 일관성이 있으면 나으련만, 나쁜 약을 통해서라도 가짜초능력과 추진력을 얻으려는 사업가 류시오와 첫눈에 마음을 뺏긴 강남순 앞에서의 남자 류시오에는 전혀 다른 인간형이 노출됐다.
물론 연기를 기막히게 잘하는 배우라면 단선적이지 않고 입체적인 캐릭터 류시오가 더 매력 있게 다가왔겠으나, 당시의 변우석은 다면적 캐릭터를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뇌리에서 지워지나 싶었던 변우석이 다시 살아왔다. 그저 부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과 아시아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파워의 별이 됐다.
사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연출 윤종호·김태엽, 극본 이시은, 제작 CJ ENM 스튜디오스·본팩토리)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OTT(Over The Top, 인터넷TV) 티빙에 매일 1위로 걸려 있어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드라마 ‘SKY캐슬’(연출 조현탁, 극본 유현미)에서 한서진(염정아 분)의 딸 예서 역을 맡아 당찬 연기를 보여주었던 김혜윤(임솔 분)이 여자 주인공이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유쾌해지는 배우 김원해와 정영주가 각각 선재(변우석 분) 아빠와 솔이 엄마로 등장하고, 이분의 연기 내공이 이렇게 깊었던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성병숙이 솔이 할머니로 나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힘쎈 여자 강남순’에서 변우석이 불안하게 만들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버틸 수 없는 때에 이르렀다. 이제 ‘선재 업고 튀어’, 그 속의 류선재, 그를 연기한 변우석을 논하지 않고서는 대화에 낄 수 없을 만큼 지배적 화두로 등극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봤다! 이토록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줄 때는 분명 이유가 있다.
우선, 기대했던 배우들은 기대 이상의 호연을 펼쳤다. 김혜윤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박은빈급으로 10·20·30대의 임솔 캐릭터를 가지고 놀았다. 김원해와 정영주는 엄마 같은 부성과 털털한 모성을 기본으로 연애 감정 없이 이웃의 정으로 가능한 최대치의 티키타카를 과시했다. 성병숙은 할머니 및 치매를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며 모든 기억을 지닌 채 시간을 넘나드는 영험한 존재로 해석한 이시은 작가의 신선한 설정을 완벽하게 소화, 감동을 안겼다.
그리고 앞으로 지켜봐야 할 청춘의 배우들을 ‘선재 업고 튀어’를 통해 만났다. 솔이 친구 이현주 역의 ‘연기 영재’ 서혜원, 솔이 오빠 임금 역의 ‘매력 영재’ 송지호, 솔이가 2주 사귄 전 남친으로 변함없는 염려와 애정을 쏟는 김태성 역의 송건희, 선재가 보컬인 밴드 이클립스의 리더 백인혁 역의 이승협과 멤버 문시온(현수 역)과 양혁(제이 역), 선재 대학친구 초롱이 역의 이우제와 언급하지 못한 배우들. 태성이 아빠이자 임솔 납치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는 김 형사 역의 박윤희 배우도 너무 좋았다.
드라마 시청의 큰 기쁨, 필자의 선입견을 반성하게 한 배우는 변우석이었다. 서른 살이 넘도록 연기의 태가 나지 않던 배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늘에서 ‘연기 치트키’라도 떨어진 것일까. 물론 아니다.
불안감을 날리다 못해 계속 등장하는데도 다음 등장을 손꼽아 기다리게 할 만큼 반하게 만들어버린 ‘내 마음대로’ 이유를 세 가지로 추려봤다.
첫째는 류선재라는 캐릭터다. 지구상의 여자들이 우주를 털어 바라는 남자의 ‘이상’(理想,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을 이시은 작가는 류선재에게 집결시켰다. 외모만도 아니고 추상적 이미지로도 아니고, 실질적 일상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행위들과 말 표현 하나하나에 다감한 배려와 아낌없는 정성을 드러냈다.
선재에게 1순위는 언제나 솔이였다. 자신보다 솔이를 더 사랑했다. 우산 하나를 씌워 주든 버스에서 잠든 솔이를 깨우지 못하고 바라만 보며 함께 정류장을 지나치든, 심지어 솔이를 구하느라 자신의 인생이 일찍 마감된다 해도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는 극치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윤종호·김태엽 감독은 그런 선재의 일거수일투족을 ‘별빛 속에’ 우리에게 배달했다. 어떤 남자배우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것도 줄기차게 화면에 담아줄까 싶을 만큼 공을 들였다.
둘째는 ‘선재 업고 뛴’ 배우들이다. 연출가와 작가의 의도일 것인데, 선재의 정적인 캐릭터가 심심해 보이지 않도록 솔이를 비롯해 모든 캐릭터를 약간 과장되고 살짝 붕 뜬 인물들로 설정했고, 실제로 배우들은 찰떡 연기로 작품의 간을 딱 맞췄다. 특히 임솔 역의 김혜윤은 변화무쌍한 연기를 통해 언제나 그 자리에 미소 짓고 선 류선재 역의 변우석과 기막힌 결합을 선보이며, 완전체로 시청자를 울리고 웃겼다.
덕분에 선재와 변우석은 한결 자연스럽고 밝아 보이고, 다른 배우들은 연기력이 더욱 빛나 보이고, 결과적으로 드라마는 풍성해지는 윈-윈(win-win, 모두가 득을 보는)의 시너지효과(상승효과, 종합효과)가 발생했다.
셋째는 배우 변우석이다. 류선재 역에는 변우석이 최상급 선택이다. 호조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대본이 다른 이들을 빗겨 결국 변우석에게 왔다. 짧지 않은 시간 제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묵묵히 전진해 온 변우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심 왜 변우석이어야 했는가 하니. 그간 주연 노출이 많아 익숙한 배우, 또 연기 기술이 뛰어난 배우는 사랑하는 솔이를 위해 주저 없이 제 목숨을 내놓는 선재를 우리에게 설득하기 어렵다. 능숙한 기술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개인에게는 쉽지 않은 시간이었겠으나 서른이 넘어 신선함을 보존한 변우석의 배우력이 10~30대의 나이를 오가는 류선재에게 큰 도움이 됐다. 연습과 노력을 통해 많이 나아졌으나 아직은 약간 뻣뻣한 말투도 류선재의 순수함을 극대화했다. 연기력 부족으로 보이지 않고 되레 그런 말투와 이런 미소를 지닌 류선재의 실존처럼, 현실감을 높였다. 극중에서 류선재가 부르는 ‘소나기’를 비롯해 모든 노래를 직접 부른 것도 리얼리티를 살렸고 시청자의 마음을 더욱 세차게 훔쳤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해 연애 세포 깨우는 극본 위에, 딱 제 옷을 입은 것 같은 배우들의 호연, 이 모든 걸 놓치지 않고 캐릭터와 극의 감성을 십분 살려 판타지를 일상으로 뽑아낸 연출이 하나 되며 ‘선재 업고 튀어’를 완성했다.
어느 작품인들 그렇게 만들지 않으랴마는. 시청자를 잡아끄는 주인공들의 매력, 오신 손님 놓치지 않는 조·단역들의 열연, 일단 클릭만 하면 한 번만 보고 그만두는 시청자 없게 만드는 제작진의 정성으로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는 성공했다.
시작할 때는 모두의 도움으로 반짝거렸던 변우석이 공개된 후에는 향후 모두에게 득을 가져다줄 ‘블루칩’으로 성장하는 반전. 역전과 반전이 어려운 세상살이에 맛보는 하나의 쾌감, 오랜만에 만나는 현실의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