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부흥' 노리는 日, 글로벌 반도체 기업 유치 및 자국 기술 개발 '총력'
中 굴기 저지하고 대만 의존도 낮추려는 美, 日과 반도체 재건 용인
기업이 정부에 읍소하는 韓과 대조…반도체법 통과시키고 공급망 빠르게 구축해야
'반도체 부활'을 꿈꾸는 일본의 움직임이 바쁘다. TSMC, 마이크론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 투자를 끌어내기 위해 일본 정부는 최대 50%의 보조금을 책정하는 한편 자국 기업 육성을 위해서도 조 단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의 기술 굴기를 좌절시키고, 대만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려는 미국의 전략을 기회로 삼아, 일본을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로 육성시키겠다는 목표다. 심기일전하는 일본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오히려 기업이 정부를 찾아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상황으로 기술 경쟁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18일 외신 및 업계에 따르면 집권 자민당과 연립여당인 공명당, 야당인 일본유신회와 국민민주당 등은 참의원(상원)에서 반도체 산업 육성 등 일본 경제 정책을 뒷받침할 2024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을 전날 가결했다.
규모는 총 13조9433억엔(약 130조원)으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 지원에 1조3054억엔(약 12조원)이 포함됐다. 이 반도체 예산의 상당 부분은 일본 라피더스(Rapidus)의 연구개발비(R&D), 운전자금 등으로 쓰일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추경에서도 1조8000억엔을 반도체 산업에 배정했다.
라피더스는 키옥시아, 토요타자동차, 소니, 소프트뱅크 등 일본 기업 8개사가 2022년 설립한 반도체 기업으로, 2025년부터 홋카이도 공장에서 2nm(㎚·10억분의 1m) 파운드리 제품을 시험 생산하고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히가시 테츠로 라피더스 회장은 최근 "2nm 칩 시험 생산을 위한 모든 장비 설치가 내년 3월까지 완료되며, 4월부터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nm 반도체 공정 개발을 위해 작년 말 라피더스는 미국 IBM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 핵심인 GAA(게이트 올 어라운드) 노하우를 IBM에서 전수받을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필요 자금 5조엔 중 최대 9200억엔(8조37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는 등 적극적으로 라피더스의 성공을 돕고 있다.
일본 정부가 라피더스에 공을 들이는 것은 반도체가 첨단전략물자로 떠오르면서 귀한 몸이 된 것도 작용하지만,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 반도체 강자 자리를 되찾아오겠다는 의지가 더 강력한 것으로 비쳐진다.
WSTS(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반도체 점유율은 1988년 40.2%를 기록하는 등 한때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지만 이후 가파르게 점유율이 하락하며 2021년 기준 7.9%에 그치고 있다.
일본 반도체 몰락에 대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따른 일본 반도체 가격경쟁력 상실 ▲디지털전환(DX) 지연 ▲일본 내 파운드리 부재 ▲일본 제조사들의 투자 부족과 한국·대만·중국의 국가적 육성 정책 등을 꼽았다. 일본의 반도체 장악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의 견제와 이를 대응할 전략 부족으로 일본 반도체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글로벌 상황은 달라졌다. 미·중을 중심으로 첨단 기술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자국 주도의 공급망 구축을 위해 일본에 다시 손을 내밀었다. 지정학적 우려가 없는데다, 미국 정책에 적극 호응하고 있는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판단에서다. 일본 역시 공급선 다각화를 목표로 이뤄지는 미국의 지원을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있다.
과거의 반도체 몰락 과정을 교훈 삼아 일본은 적극적으로 기술 공동개발 및 설비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실제 일본은 메모리-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R&D(연구개발)을 아우르는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 유치를 속속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규슈 구마모토현에 1공장을 지었고 연내 양산을 앞두고 있다. 1공장에서는 소니, 덴소 등에 공급할 12∼28nm 공정의 연산용 로직 반도체를 생산한다.
최신 파운드리 기술은 3nm로 첨단 공정은 아니지만, 현재 일본이 양산 가능한 공정이 40nm에 머물고 있음을 고려하면 기술 혁신에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 평가된다.
2공장은 10nm 이하 공정을 도입할 예정으로, 최첨단 기술 확보에 잰걸음을 낼 방침이다. 내년 1분기 중 착공하며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1·2공장 총 투자액은 2조9600억엔으로 일본 정부가 절반에 가까운 1조1080억엔(10조3616억원)을 지원한다. TSMC 1·2공장 확보로 규슈는 '반도체 클러스터'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은 파운드리 외에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은 내년 가을부터 미에현과 이와테현 공장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한다. 낸드 시장에서 각각 2위, 4위업체인 이들은 안정적인 낸드 생산을 통해 장악력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가하면 미국 마이크론은 히로시마에 차세대 D램 공장을 신축, 데이터센터, AI(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에 필요한 첨단 D램을 2027년부터 생산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일본 요코하마시에 첨단 반도체 연구개발(R&D) 시설을 건설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생산 기술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반도체 '큰 손'들의 잇따른 투자로 일본의 반도체 산업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보인다. 다국적 기업들의 일본행은 일본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에서 강점을 가져 시너지가 예상될 뿐 아니라 정부 및 지자체가 발벗고 나서 막대한 보조금·인프라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부흥을 위해 일본이 총력전을 펼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정부 차원의 대응이 늦어지면서 눈총을 받고 있다. 여·야의 강대강 대치로 경제·산업 법안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 탓이다.
대한상의, 무역협회, 경총, 중기중앙회 등 4명의 경제단체장은 전날 우원식 국회의장과 간담회를 하고 무쟁점 법안이라도 조속히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무쟁점 법안 대표격으로는 반도체 특별법이 꼽힌다.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기업 근로자들의 경우 주 52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보조금 등 재정 직접 지원을 골자로 한다.
업계는 대내외 경쟁환경이 심화되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현행 근로시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정부에 전달해왔다. 그러나 기존 제도로도 노동시간 유연화가 가능하다며 '노동시간 규제 완화' 조항에 반대해온 민주당이 이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반도체 공장 등의 전력 공급을 위한 전력망 특별법도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최태원 상의 회장은 "무쟁점 법안 만이라도 연내 통과된다면 대한민국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긍정적 시그널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또한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일몰 기한을 올해 말에서 3년 연장하는 내용으로만 국회 문턱을 넘었다. 앞서 여야는 통합 세액공제율을 현행 보다 5%p 높이기로 했지만 정작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개정안에는 이 내용이 담기지 않아 '반쪽짜리'라는 비판이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탄핵 정국으로 한국 경제가 전례없는 위기에 놓인 만큼 이제라도 국회와 정부가 합심해 '반도체 로드맵(안)'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중국 투자 리스크, 미 반도체 보조금 확정 등에서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인 민·관 컨트롤타워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업계 관계자는 "각국은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발로 뛰는 반면 한국은 속도가 나지 않고 있어 자칫 한국 반도체가 고립무원 신세가 될까 걱정"이라며 "기업이 기술 개발에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루라도 빨리 반도체법을 통과시키고 경제팀을 중심으로 통상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