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티브적 해석: 반도체 리더십 위해 美 투자는 필수불가결. 보조금은 덤.
#네거티브적 해석: 분명 도장 찍었는데 돈 줄 사람이 바뀌었네? 받으면 다행인 계약.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가 미국 상무부의 반도체 지원을 확정받았습니다. 반도체 지원은 직접 보조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2022년 8월 발효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근거로 합니다. 이로써 SK하이닉스는 4억5800만 달러(약 6645억원), 삼성전자는 47억4500만 달러(약6조8845억원)를 수령하게 됩니다.
'억 소리' 나는 금액이죠? 미국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붓게 된 배경은 뭘까요? 여기에는 미국의 '중국 반도체 굴기 억제', '미국 중심 공급망 재구축'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자리합니다.
오바마 정부부터 시작된 대중국 견제는 트럼프 1기 정부에서 '관세 카드'로 노골화됐고, 바이든 정부 들어서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와 과학법으로 구체화됐습니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에 총 527억 달러 상당을 지원하겠다는 제도입니다. 구체적으로 반도체 제조(390억 달러), 연구개발(132억 달러)로 나뉘며 미 본토에 제조 설비를 짓는 기업에게는 25%에 달하는 세액 공제도 제공합니다.
여기서 반도체 제조 지원의 경우 기업 투자액의 최대 15%를 보조금으로 지급합니다. 투자금이 1조원이라면 1500억원을 현금으로 꽂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미 투자를 염두에 두고 있던 기업이라면 구미가 당길만도 하지요.
대신 미국은 보조금을 주되 초과 이익을 달성하면 일정 부분을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주요 반도체 생산 제품과 생산량, 고객과 더불어 생산 장비와 원료명도 기재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 중국 공장 증설 제한도 조건으로 달았습니다. 중국 공장 증설 제한의 경우 첨단 공정은 생산능력의 5% 이상을, 이전 세대인 범용(레거시) 반도체는 10% 이상을 늘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을 조건으로 법인세 뿐 아니라 각종 명목의 이익까지 뜯기는 이중 과세 부담을 안게 됐습니다. 또 미국이 원하면 반도체 생산·연구 시설까지 공개해야 하는 기술 안보 리스크마저 짊어져야 합니다.
이득 보다는 손실이 더 큰 것 아니냐는 우려가 당연히 나오겠지요? 국내 경제단체인 한국경제인협회는 미국의 보조금 조건이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하면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형평성에 맞는 반도체법 보조금 요건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 반도체가 미국의 입맛대로 놀아나는 종속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를 전한 것입니다.
'황금 사과'냐 '독이 든 성배'냐 갑론을박 속 세계가 주목한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제도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한 외국 반도체 제조사들은 택하기로 합니다. 고심 끝에 미국 투자를 결정한 것입니다.
대만 TSMC는 총 650억 달러를 미국 본토에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TSMC는 400억 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에 피닉스 1·2공장을 짓고 있으며 3공장을 위해서는 250억 달러를 추가 투입할 예정입니다.
삼성전자는 37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2nm(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을 위한 최첨단 팹, 첨단 연구개발(R&D) 시설을 짓기로 했습니다. SK하이닉스는 40억 달러를 들여 미국 인디애나주에 신규 어드밴스드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이 대가로 TSMC는 66억 달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47억4500만 달러, 4억5800만 달러의 보조금을 받게됩니다.
독소조항이 담긴 보조금인데 이걸 받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보조금을 포기하고 차라리 자국에 투자를 더 늘리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반도체 생태계는 다소 복잡합니다.
반도체는 설계-제조·패키징(후공정)-소재·부품·장비 기업간 거래가 깊게 얽혀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설계에, 한국·대만은 생산에, 일본·네덜란드 등은 소·부·장에 강합니다.
어느 한 곳을 빼놓고 반도체 밸류체인(가치사슬)을 이야기하기가 힘듭니다. 제조에 강한 한국은 더욱이 설계, 생산장비 등 전방공정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미국을 배척하기 어려운 상황이지요.
미국반도체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장비에 대한 미국 점유율은 41%이며 설계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반도체 설계는 각각 74%, 67%로 높습니다. 이는 미국 기술로 만든 해외 생산 반도체 장비가 적지 않음을 의미하며, 미국의 규제 조치에 한국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미 본토 내 팹리스-파운드리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네요. 미국 내 엔비디아, AMD, 오픈AI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이 다수 포진해있는 만큼 국내 기업들은 이들이 원하는 칩을 수주하는 게 용이할 수 있습니다.
현재 빅테크들은 AI 칩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이런 트렌드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삼성과 TSMC, 인텔이 경쟁적으로 2nm 기술력 제고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국내 반도체 기업은 미국행을 택했습니다. 독소조항이 무겁게 다가오지만 반도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대가로 받는 보조금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보조금 '0원'과 보조금 '7조원'(삼성) 차이는 비교할 수 없지요.
그런데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변수는 제도가 아닌 사람, 바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입니다. 트럼프 당선인은 후보 시절부터 보조금 정책을 꾸준히 비판해왔습니다.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죠.
그는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관세를 높이면 그들(외국 기업)이 와서 반도체 회사를 공짜로 만들 것"이라며 관세를 올려 해외 투자를 촉진하겠다는 의도를 어필한 바 있습니다. 보조금을 지원하는 대신 관세를 올리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알아서 미국에 투자 깃발을 꽂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 비벡 라마스와미도 11월 "(바이든 행정부가) 정권 인수 전에 (보조금) 지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당장 1월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정부의 '입'을 해외 기업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미국 기업인 인텔, 마이크론 보조금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아도 TSMC, 삼성, SK의 경우 어떤 딴지를 걸지 모릅니다. 분명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는 데 거래처 사장이 바뀌었다며 모르쇠 전략을 구사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보조금 지급 철회라는 초강수는 트럼프 정부가 강조하는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설비 구축 차질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제도 자체는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물론 내용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미 현지 기업에 대한 지원 비중을 늘리거나 동맹국을 대상으로 한 가드레일 조항 및 보조금 지원에 대한 추가 조건을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울며 겨자 먹기'가 되지 않도록 민·관 총력전이 시급합니다.
가뜩이나 창신메모리(CXMT), 양쯔메모리(YMTC) 등 중국 메모리 제조사들이 기술 추격에 나서는 상황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면 주요 투자 축인 미국 공급망 불확실성을 하루라도 빨리 해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희망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트럼프 당선인의 대응도 만만치 않을거란 각오도 해야 될 겁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16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4년간 1000억 달러(약 14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하자, 트럼프 당선인은 한 술 더 떠 '따블'을 외칩니다. "2000억 달러(약 290조원)로 늘려줄 수 있겠나?(Would you make it $200 billion?)"
한국 반도체에 드리운 먹구름이 빨리 해소되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