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기에 들어선 대통령의 권력
정치적 카오스로서의 입법 독재
최 권한대행 향해서도 탄핵 협박
‘입법 독재’라는 것을 상상한 국민은 아마 거의 없었을 듯하다. ‘독재’는 언제나 통치권자의 몫이었다. 대부분의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그건 통치자의 특권이자 형벌이었다. 살아서는 특별한 권력을 휘두르고, 실각하거나 죽어서는 그 앙갚음을 받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도처에서 등장한 신생 독립국들은 주로 미국식 대통령제를 국가통치구조로 채택했다. 그리고 대다수가 실패의 악순환이라는 늪에 빠졌다. 통치자들이 권력에 중독된 탓이었다. 권력의 본질은 폭력이고 야수성이다. 독재자들은 권력이라는 야수의 등에 올라타고 국민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해체기에 들어선 대통령의 권력
우리 헌정사에도 독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악랄한 야수적 독재자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유수의 경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같은 역사적 사실이 포함된다. 정치적으로도 우리는 세계사적 모범 사례로 꼽혔었다. 그런데 그 위상이 최근 들어 곤두박질을 거듭한다.
이 또한 대통령제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중심제가 쉽게 권위주의 통치체제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인 게 역사적 사실이지만 우리 민주정치의 좌절은 그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 약화가 정치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대통령의 권력은 1987년 9차 개헌 이후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고,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기를 통해 심하게 약화했다.
그는 끝없는 불평불만과 전선(戰線) 확대로 대통령직 경량화에 앞장섰다. 대통령직을 희화화하고 자신에게 싸움닭 이미지를 씌운 것이다. 그 이전까지 대통령은 희로애락을 드러내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대통령의 말은 엄청난 무게를 가질 수 있었고, 그 자체가 권력의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말을 사리는 법이 없었다. 그 점에선 ‘대통령의 민주화’를 실천한 대통령이라고 불릴만했다.
그의 지나친 대통령직 경량화와 도발적 정치 스타일이 임기 초 탄핵소추를 불러왔다. 사실 탄핵돼야 할 만큼 큰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도 기각이 되었지만, 그의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그는 좌충우돌하며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은 여당으로부터도 버림받고 말았다.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의 길도 가시밭이었다. 이미 대통령의 위상은, 떨어져 가을비에 젖어버린 낙엽의 처지가 되어 있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탄핵소추가 시도됐고, 결국 그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슨 ‘국정농단’인가 하는 신종 죄목으로, 살아서는 교도소 문을 나설 수 없을 만큼의 중형을 선고받아 오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직의 권위 회복을 추구하는 인상을 준 게 정적들의 거칠고 집요한 공격을 불렀을 수 있다.
정치적 카오스로서의 입법 독재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코미디 같은 행태를 지속적으로 노출했지만 그게 좌파 사회단체와 정치세력이 원하던 대통령상이었다. 코미디 리더십을 원한 게 아니라 그의 행태가 좌파의 입맛에 맞았다는 뜻이다. 그는 좌파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위상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그의 세력은 ‘적폐청산’의 칼을 대단히 위협적으로 휘둘렀고, 우파 정치세력은 주눅이 들어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과거엔 그토록 막강했던 ‘대통령의 권력’이 87년 헌정체제 아래서 해체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과 그들이 장악한 국회, 정치성 사회단체는 물론이려니와 사법부와 헌법재판소 등 국가 작동의 핵심 기관들까지도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맹렬히 권력의 장에 몰려들었다. 저마다 추장(酋長)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정치 민주화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질서 있는 권력의 재편이라면 민주화의 도정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욕망의 분출은 혼란을 낳을 뿐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무너지면서 국가 3권 간에 견제와 균형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가 도래했을까? 어림없는 기대였다. 오히려 혼란의 도가니가 입을 벌리고 정치를 삼키는 카오스의 시대가 열렸다.
‘입법 독재’라는 것이 바로 정치적 카오스의 한 양태(樣態)다. 대통령중심제의 권력구조를 가진 정치체제에서 거대정당이 입법부의 이름을 빌려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일러 ‘입법 독재’라고 한다. 압도적 다수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이 벌이고 있는 작태가 그것이다. 민주당은 대추장(大酋長) 격인 이재명 당 대표를 그의 심복인 소추장(小酋長)들이 옹위하면서 국가 통치권 행사를 획책하는 정치 집단이 됐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18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 대행에게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의 임명을 강하게 압박했다.
최후통첩 식 요구다. 아니면 그다음 날 그러니까 20일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를 할 수 있다는 엄포이겠다.
민주당은 이 대표 취임 이후 29건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그중 13건을 본회의에서 가결했다. 이 가운데 8건이 헌재에서 기각됐다. 인용된 경우는 이제까지 단 한 건도 없다. 이들이 국회의 대정부 견제 수단인 탄핵소추권을 가지고 무슨 짓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 권한대행 향해서도 탄핵 협박
최 대행에 대해서도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민심이 두려우면 당연히 포기해야 할 일이지만 이미 탄핵소추 관성이 붙은 상황이다. “나 좀 말려줘” 하면서도 관성에 밀려갈지 누가 알겠는가. 마 후보자 임명을 이처럼 강요하다시피 하는 것은 헌재의 분위기가 안 좋다는 반증일 수 있다. 그를 헌재에 밀어 넣지 않으면 탄핵 인용이 어렵다는 판단인가?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 수 시간 만에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기 무섭게 그를 ‘내란 수괴’로 부르기 시작했다. 전체 국민의 선택으로 취임한 대통령이다. 사법적 판단이 내리기도 전에 그런 멸칭(蔑稱)을 붙이는 것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망동(妄動)일 것임에도 민주당은 거침이 없다. 4개의 전과, 8개 사건에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대표로 떠받들고 있는 정당이!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정족수 미달로 부결되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표결 불성립’이라는 해괴한 핑계로 재표결을 해 기어이 통과시켰다. 일사부재의의 원칙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다. ‘내란죄’를 걸어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놓고는 재발의 및 표결의 절차 없이 이를 철회하고, 헌재의 협조를 얻어 심판을 이끌어왔다. 입법 담당자들이 헌법과 법률의 정신 및 규정을 농락하고 있다. 오직 당 대표의 사법적 족쇄를 풀고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그 위대한 대추장은 갑자기 총기 암살 기도 제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걸 이유로 자신이 총동원령을 내린 14일의 광화문 현장 최고위원회의 및 주말 장외집회에 빠졌다. 사설 경호원들의 경호뿐만 아니라 경찰의 신변 보호도 받기 시작했다는데 참으로 보여주는 것, 들려주는 것 많은 대표다.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사태가 생긴다고 하자. 거대 야당의 핍박과 횡포에 밀려나는 대통령이라면 그런 자리 차지해서 뭘 하시게? 이 대표가 앉으면 대통령의 지위와 권위가 복원될까? 천만에! 이미 대통령직은 상처를 입을 대로 입었고, 그걸 노리는 권력 사냥꾼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들끓고 있지 않은가.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