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감독 김종관, 제작 볼미디어㈜, 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 2020)가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3차 대유행으로 극장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서 개봉 1주일 만에 10만명이 ‘조제’를 관람했다.
관객들이 영화 ‘조제’를 선택하는 데에는 지난 2004년 국내 개봉한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감독 이누도 잇신, 수입 ㈜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2003)에 대한 사랑도 한몫하고 있다. 관람 후기 역시 원조 일본영화와 리메이크 한국영화를 비교하는 글들이 많다. 필자 역시 관람 내내 뇌의 한쪽으로는 영화를 즐기고, 다른 쪽으로는 2003년 작을 떠올렸다. 피할 수 없는 비교다.
큰 그림부터 얘기하자면 바뀌어서 좋은 점, 바꿔서 아쉬운 점이 자연스레 들어왔고 바꾼 이유도 짐작이 됐다. 영화가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기도 했다. 김종관 감독 특유의 결, 사건의 전개가 아니라 정서의 흐름으로 정적이고도 아름답게 완성됐다. 작은 부분의 공통점과 차이부터 짚어 보면 얘기가 좀 더 쉬울 듯하다. 작은 물줄기는 결국 강으로 만난다.
먼저 여자 주인공 조제부터 살펴볼까. ‘조제’가 여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소설,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의 주인공 이름이라는 것은 두 영화에서 같다. 한국영화에서는 마치 본명인 양 내내 조제로 불리는데, 일본영화에서는 쿠미코라는 본명이 먼저 등장하고 조제로 불리길 원한다는 게 명확히 드러난다. 일본영화에서 조제가 읽고 싶어 하는 프랑스 작가 사강의 소설은 ‘멋진 구름’인데, 한국영화에서는 사강의 다른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바뀌었다.
김종관 감독은 조제라는 이름에서 유럽으로 상상의 나래를 뻗는다. 조제가 말한다, 자신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혼혈로 태어났고 한국인 어머니를 많이 닮아 외국인 느낌은 나지 않는다고, 전 세계를 여행하다 이제 이곳에 머물며 지난 추억들을 회상한다고. 다리가 불편한 조제가 위성 카메라 앱으로 세계 곳곳을 누빈 이야기인데 거짓과 과장이 섞여 있다. 2003년 즈음에는 없었던 스마트폰과 앱, 17년이 흐른 시간적 배경에 맞춰 현실감 있게 추가됐다. 어찌나 현실감 있게 연출하고, 한지민이 얼마나 태연하게 말하는지 ‘아닐 텐데’ 하면서도 일면 믿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일본영화 속 조제는 학교에 다니진 않았지만 할머니가 주워 온, 동네 사람들이 내다 버린 책들을 읽어 상식이 풍부하다. 한국영화 속 조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위스키에 대해 해박하다. 한국영화 속 조제의 할머니는 그저 괴상한 할머니가 아니라 넝마주이로 설정됐고, 책만 주워오는 게 아니라 폐지며 가구를 주워 오고 빈 병도 모은다. 후각이 뛰어난 조제는 냄새만으로 제조공정과 탄생 레시피를 읊는다. 덕분에 한국영화의 조제에겐 좀 더 지적인 이미지, 진중한 느낌이 보태졌다. 일본의 조제가 하는 ‘주방에서의 다이빙’ 같은 동작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본영화에서 이케와키 치즈루, 한국영화에서는 한지민이 연기했는데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깨끗한 이미지는 같다.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려도 가릴 수 없는 미모도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한국영화 쪽이 한 수 위다.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일본영화의 조제는 고집 세고 독특하고 귀여운 측면이 강하다면, 한국영화의 조제는 자기보호막이 두텁고 비밀이 많고 어두운 느낌이 강하다.
조제의 이미지는 영화 전체의 색감과도 직결된다. 일본영화에는 햇살이 많고 조제의 집도 자연광으로 밝은 느낌인데, 한국영화에서는 밤 장면이 많고 인물 중심의 인공조명이 드리운 집안에서는 어쩐지 눅눅한 습기가 느껴진다. 그 색감은 요리를 잘하는 조제가 만드는 음식에도 영향을 준다. 일본의 조제는 맑은 된장국에 색색의 채소 조림, 노란 달걀말이를 첫 식사로 내주고 츠네오 역시 아주 맛있게 먹는데. 한국의 조제는 시커먼 번데기 찌개를 끓여 주고, 먹기를 주저하는 영석에게 “왜,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라고 일갈한다. 뺏어 먹고 싶은 달걀말이, 눈을 반짝이며 복스럽게 먹는 장면이 없는 건 매우 아쉽다.
남자 주인공 얘기를 해 볼까. 일본영화에서의 이름은 츠네오,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했고 한국영화에서는 영석, 남주혁이 표현했다. 같은 점은 애초부터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살기에 바쁘고 적당히 이기적인 평범한 청년인데 조제를 만나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한다. 본인조차 잘 알지 못하지만, 진정 사랑에 그것도 깊이 빠진 것이다. 선하면서도 미더운 인상의 배우를 캐스팅한 것도 공통점이다.
차이점이라면 사소하게는 남주혁의 키가 츠마부키 사토시보다 훨씬 커서 조제를 업는 장면에서 좀 더 안정감 있다. 일본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나이 차는 중요치 않지만, 한국영화에서는 조제가 누나임을 명확히 하고 있고 그래서 조제의 ‘처음부터 반말’, 영석의 ‘어색한 반말’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밀었다 당겼다 하는 재미를 부여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의 츠네오는 조제에 대한 사랑을 꾹꾹 눌렀다가 마지막 한 번의 울음으로 표출해 낸다면, 한국의 영석은 한 발 한 발 눈길을 걸어 조제에게 다가가듯 그 사랑의 그라데이션을 서서히 점층적으로 드러낸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고 영화의 특성과 감독의 연출 방향에 맞춰진 결과인데, 가슴이 더 미어지는 쪽은 영석이다. 츠네오는 나중 울고, 영석은 먼저 운 뒤 마지막에 한줄기 눈물을 조용히 흘리는데 그 드러낼 수 없는 애처로움이 깊게 다가온다.
일본영화에서 “이제 오지 마”는 할머니, “가지마”는 조제의 입을 통해 얘기되지만, 한국영화에서는 둘 다 조제가 말한다. 숨어 사는 이유가 일본영화에서 할머니의 의지가 강하다면, 한국영화에서는 조제의 선택이다. 특히 “가지마”가 일본영화에서는 조제의 매달림과 츠네오의 수긍 측면이 있다면, 한국영화에서는 조제가 드디어 마음을 열고 영석은 자신의 선택으로 사랑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중요한 두 고비가 한국영화에서는 조금 더 연인들의 위기, 그것을 극복한 사랑의 시작으로 그려졌다.
빠질 수 없는 삼각 구도,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또 한 명의 여자는 두 영화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영화에서 카나에는 츠네오의 동기로 나오는데, 한국영화에서는 후배 수경으로 나온다. 카나에(우에노 주리 분)의 비중은 꽤 크고 조제와 츠네오의 관계에 깊숙이 개입하지만, 수경(이소희 분)은 영석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정도다. 수경은 고모가 사회복지사이고 조제의 집 공사를 직접 주선하지만, 그래서 공사가 한창일 때 고모와 연락해 조제의 집에 오지만. 카나에는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고, 츠네오가 시청에 신청해 진행 중인 공사에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라며 예고 없이 견학을 온다. 내세운 이유는 다르지만, 조제를 보고 싶어 방문한 내막은 같다.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은 전혀 다르다. 일본영화에서는 조제의 이웃 아이들이 종종 등장하고 이상한 아저씨도 등장하지만 한국영화에서 조제의 곁에는 할머니와 보육원에서 함께 나온 철호뿐이다. 캔디 같은 조제, 외로움이 짙은 조제, 두 조제의 캐릭터 차이에서 오는 필연이다. 츠네오의 남동생, 친구들, 학교 후배가 등장하지만 영석에게는 교수들의 존재와 아르바이트 동료가 중요하다. 일본영화에서는 남동생을 통해 결혼에 난관이 될 가족(사실은 츠네오 스스로의 난관)의 존재를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친구들과 후배, 신입생 환영회 등을 통해 성적 농담과 일본의 성문화가 배어난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는 성관계에 대해 좀 더 엄숙한 우리 문화 또 양성평등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사라졌다. 대신 거주공간으로서의 집, 대학등록금, 취직과 같은 ‘현실’이 중요한 세태가 새로이 채워졌다. 그 결과, 영화의 결론도 매우 현실감 있게 바뀌었다.
인물 기준으로 살피면서 대략 그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추억 속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오늘의 ‘조제’는 기본 설정은 같으나 결이 상당히 다르다. 일본영화가 밝은 색감 속에서 간간이 웃음과 함께 조금은 특별한 사랑을 그렸다면, 한국영화 ‘조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혹은 스스로 손 놓아버린 사랑의 아픔을 천천히 음미하게 한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한국영화 ‘조제’에서 몇 가지 미덕을 보았다. 작게는 스토리 라인이 매끄럽다. 김종관 감독은 조제가 보육원에서 나와 할머니 집에 살게 된 과정, 할머니와의 관계, 두문불출 숨어 사는 이유를 철호(조복래 분)의 입을 통해 알렸고, 영석이 수경과 교수에게 하는 행동과 결정적 선택의 배경을 우리가 알 수 있게 했다. 영화에서 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음에도 인물에 역사성이 부여되고 행동에 설득력이 생기니 이야기의 개연성이 높다. 일본영화에서 느껴졌던 구멍을 찾기 어렵다. 더불어 2020년 현재, 한국에서 벌어질 법한 이야기로 현실감을 높여 ‘토착화’ 리메이크를 했다.
크게는 일본영화가 청춘의 한때, 영화의 시작처럼 추억의 사진첩을 열어 보여주는 달콤한 느낌이 강하다면 한국의 ‘조제’는 달콤하고도 씁쓸한 사랑의 참맛을 맛보게 한다. 사랑하기에 떠나보내고 사랑하지만 떠나는 ‘사랑의 아이러니’, 어쩌면 청춘일수록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랑의 민낯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역설이지만, 써서 더 달게 느껴지는 사랑, 단맛을 절감케 하는 쓴맛의 아름다움이 ‘조제’에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 ‘조제’가 1984년에 나온 다나베 세이코의 원작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주제의식에 가깝지 싶다. 소설은 연애를 인생과 세상의 중심에 두지 않고 사랑의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여성을 지향하는데, 일본영화에서는 츠네오가 마음으로 도망치고 한국영화에서는 조제가 영석을 보낸다. 일본영화에서 조제에게 의미 깊었던 호랑이와 물고기가 한국영화에서는 제목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아쉽다면, 물고기처럼 자유로이 유영하게 된 조제를 통해 서운함을 달래면 어떨지. 제목에도
16년 만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보았다.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제한적인지 새삼 느꼈다. 19금 장면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당시의 내 수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을 받아들이고, 좋았던 장면들을 추억해 왔음을 알았다. 오늘 ‘조제’를 본 젊은이가 훗날 다시 본다면 평가가 같을까. 청춘의 자화상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반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