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중요한 한미정상회담은 없었다
문 대통령이 얻은 것은 싱가포르 합의 인정이 유일
극진한 예우로 한국을 끌어들인 바이든 대통령
의도치 않은 성공의 길
이보다 더 중요한 한미정상회담은 없었다
2021년 5월 21일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은 가장 다양한 의제를 다룬 회의로 기록될 듯하다. 이는 10개월 남짓 남긴 문재인 정부로서는 남북대화의 동력을 마련할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중요한 회의였고, 출범한 지 4개월 된 바이든 정부로서는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흔드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한 국제 연대에 한국을 편입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할 만남이었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볼 때, 코로나-19로 앞당겨진 새로운 세계질서 재편성을 둘러싼 미·중 양국 간의 경쟁 속에서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세계질서 재편성 흐름은 과거의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패권 경쟁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를 두고 서울대 이근 교수는 디지털 세계 질서의 재편성으로 규정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디지털 세계질서로의 재편인가, 중국이 주도하는 전체주의 디지털 세계질서로의 재편인가를 놓고 양국이 경쟁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얻은 것은 싱가포르 합의 인정이 유일
문재인 정부는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북핵 협상과 관련한 새로운 입장이 발표되도록 해야 했다. 그 노력의 결실로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2018년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 등 기존의 남북간, 미북간 약속에 기초한 외교를 추진한다는 문구가 나왔다. 핵심은 기존의 약속을 존중한다는 데 있지만, 서두에 거론된 두 개의 합의는 정치적으로 충분히 활용할 만했다. 그런데 정상외교의 목표가 일그러진 건 그다음부터다. 이 문구 다음에 정부·여당이 가장 불편해하는 의제 중 하나인 북한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해 한미가 협력하기로 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 대통령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싱가포르 합의를 토대로 미북 정상회담이 다시금 추진되기를 바라는 우리 정부의 염원과는 반대로 바이든 대통령은 북한의 행동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 말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북경제제재에 대해서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모든 나라가 완전히 이행할 것을 공동으로 촉구한다고 공동성명서에 명시했다. 자나 깨나 자력갱생을 외치며 힘겹게 버티며, 행여나 문 대통령이 숨통을 터줄 수 있을까 지켜보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북협력 사업에 사사건건 발목 잡는다고 정부·여당의 불만 거리였던 한미워킹그룹에 대해서도 ‘대북 접근법이 완전히 일치되도록 조율해 나가기로 했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이 정도면 우리 정부의 독자적 남북협력 사업 추진 의지에 대못을 박았다고 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외교로 북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며, 알맹이 없는 유화 메시지를 반복했다.
극진한 예우로 한국을 끌어들인 바이든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반도체와 백신 생산능력 2위 국가인 한국을 중국으로부터 이탈(decoupling)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백악관 생활을 8년이나 경험한 노련한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우를 갖추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 한국을 편승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도체 핵심기술의 수출통제에 협력하고, 5G를 넘어 6G 네트워크 개발을 함께하기로 했다. 한미정상회담 전에 이미, 한국 대기업은 4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미국에 투자하며 한미 반도체 동맹 구축을 지원했다.
또한, 중국의 시노팜을 앞세운 백신 외교에 대응해서 한국과 함께 포괄적인 한미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도 구축했다. 이밖에 대만 및 남중국해에서의 국제법 존중 필요성 강조, 쿼드의 중요성 인식 등의 문구를 공동성명에 포함함으로써 공개적으로 반중연합 가입을 선언한 것이다. 아차 싶은 여당 국회의원은 중국을 들러 해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안까지 했다.
의도치 않은 성공의 길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질서의 핵심은 디지털 플랫폼을 둘러싼 쟁탈전이다. 디지털 세계이니 현실 세계에서는 다를 수 있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현실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경제는 중국과, 안보는 미국과 협력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비현실적인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디지털 동맹 구축에 합의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디지털 세계질서 구축에 선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장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얻은 것이 없다고 실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될 머지않은 미래에는 오늘의 실망이 안도감과 자부심이 될 것이다.
글/이인배 협력안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