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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휴가 [조남대의 은퇴일기㊻]


입력 2024.02.27 14:01 수정 2024.03.12 10:12        데스크 (desk@dailian.co.kr)

만나면 헤어지고 오면 언젠가는 가는 것이 인간사 만고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부모자녀지간도 마찬가지다. 비록 내가 낳고 기른 자식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기도 하고 또 기회가 되면 만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시한부 여가를 즐기다 결국은 영원히 떠나보내야 할 때도 오지 않겠는가.


손녀, 손자 손잡고 어린이집 가는 필자 손녀, 손자 손잡고 어린이집 가는 필자


아들딸과 네 식구가 한 집에서 북적거리며 살다가 아들이 먼저 결혼하고 내 곁을 떠났다. 꽉 끼어 앉아야 했던 소파가 널찍해졌다. 밤송이 속에 알밤이 꽉 끼어 있다가 밤톨이 익어 하나씩 빠져나가듯이 시원섭섭하다. 들어온 것은 몰라도 나간 것은 표시가 난다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는다. 아들이 떠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도 제짝을 찾아 떠났다. 부모 품을 벗어나기가 아쉬웠던지 길 건너에 둥지를 틀었다. 네 식구가 좁은 집에서 부대끼며 살다 부부만 남으니 절간처럼 한적하다. 이제 제2의 인생을 즐기려고 할 즈음에 딸이 손녀에 이어 손자를 품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결혼하고 떠날 때는 섭섭하더니 손주들과 함께 함박웃음을 안겨주었다. 딸은 "아빠가 저렇게 호쾌하게 웃는 것을 처음 봤다"고 한다. 그렇게 무뚝뚝한 아빠였던가. 직장 다니고 자식 키우며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웃음까지 잃고 살았는가 보다. 조용하고 헐빈하던 집안에는 마른 논에 도랑물 들어오듯 손주들의 물품과 장난감으로 하나 둘 채워진다.


손녀와 손자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 손녀와 손자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


아침에는 딸네 집에 들러 어린이집과 유치원 다니는 손녀와 손자를 밥 먹이고 옷 입혀 동원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정도 자라 오누이끼리 지낼 정도가 되자 딸네 가족이 해외로 연수를 떠났다. 손주 돌보는 부담에서 벗어나니 내 삶을 되찾은 것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딸네 가족과 손주들의 웃음과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사라져 넓은 들판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나비처럼 허전함과 홀가분함이 교차한다. 이제 사회로 나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2년간 시한부 휴가다. 그때는 손주들이 훨씬 성장하여 여유가 있을는지. 자식 키울 때를 되돌아보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제일 편하고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을 경험한 바 있었으니 어떤 난관이 닥칠는지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설을 맞아 맞절하는 형제 부부 설을 맞아 맞절하는 형제 부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자식을 떠나보내고 보니 부모님이 나를 보낼 때 서운함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헤아리게 된다. 부모님은 아들만 여덟을 두셨다. 명절이 되면 아들 손주 며느리 등 삼십 명이 넘는 대식구가 모여 제수 준비하고 차례 지낸 후 식사하다 보면 온 집안이 왁자지껄하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나면 처가가 멀리 있는 동생은 제수씨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부모님과 하루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대부분 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떠난다. 그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떠나는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는 "가까이 있는 누구는 좀 더 있다가 가지 않고 너도 가려 하느냐"며 서운해 하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밀물처럼 들어올 때는 반갑고 흐뭇했지만,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자식과 손주들을 보실 때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을까. 그때 부모님의 심정을 알아챘다면 몇 시간이라도 좀 더 머물렀을 텐데. 지금 내 자식과 손주들이 떠나가서야 그 당시 부모님 심정이 어슴푸레 짐작된다.


어머니 유골을 안치하는 필자 어머니 유골을 안치하는 필자


결혼 후 신혼여행을 다녀와 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서울로 가려고 하자 아버지께서 “네 처는 여기 두고 혼자 올라가거라”라고 하신다. 언뜻 무슨 말씀인지 잘 몰라 다시 여쭈었더니 시집 가풍도 익혀야 하니 결혼 늦게 한 셈 치고 혼자 가라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우겨서라도 데리고 왔을 텐데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라 거역할 수 없었다. 낯설고 물선 시집에 아내를 두고 천근 같은 발걸음으로 올라왔다. 특히 어머니는 남은 여섯 명의 동생을 혼자 뒷바라지하시다가 며느리가 들어오자 이제 부엌일에서 좀 벗어나고파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의 시한부 휴가는 6개월이었다. 반년을 그렇게 고생하다 서울에 직장을 구하고서야 시집살이에서 벗어났다. 며느리를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은 '며느리가 있어 한동안 좀 편했는데 그 일을 또 내가 맡아야 하는구나' 하는 아쉬운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신랑도 없는 시집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둘이 만나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을 보내라' 라는 마음이었을까. 아마 양가감정이 다 들지 않았을까.


어머니 49재를 지낸 암자 어머니 49재를 지낸 암자


어머니가 아버지를 먼저 보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의 표시로 "당신 저세상 갈 때까지 잘 챙기다 내가 하루라도 늦게 가겠다"라고 하셨는데 그런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20년이나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는 청천벽력보다 더 큰 충격을 받으셨을 텐 데도 시간이 약이었던지 혼자서도 잘 적응하셨다. 함께 살던 장남마저 먼저 보내고도 별 내색 없이 견디시더니 아흔을 넘기자 기력이 떨어지신다. 젊었을 때 외지로 전근 간 남편을 대신하여 종갓집 많은 제사와 농사를 맡아 지으시며 자식을 키우셨으니 그 고생이야 오죽했으랴. 딸이라도 있었으면 심중을 조금이라고 헤아렸을 텐데. 가끔 혼잣말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딸도 하나 없는지 모르겠다” 라는 푸념을 하셨다. 지금 아내와 딸이 수시로 연락하며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이제야 어렴풋이 어머니의 심정이 짐작된다.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 필자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 필자


움직이는 것이 어려워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찾아뵐 때마다 “건강해라” “고맙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휠체어에 앉아서 돌아서 가는 자식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 이후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 달에 한 번 비닐 가름막으로 쳐진 실외 면회실에서 겨우 10분 정도만 뵐 수 있었다. 손도 한번 잡지 못하여 모자지간에 체온도 느껴볼 수 없었다. 외부와의 단절이 심해지자 밀려오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크셨던지 간호사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들어가기 싫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 만남도 몇 번을 하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불효자식이란 멍에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줌의 재가 되어 시집살이하고 어린 자식들 키우던 고향 집을 거처 선산의 아버지 옆으로 가셨다. 어머니의 휴가는 그렇게 끝났다. 어머니를 알뜰살뜰 챙기셨던 아버지는 아마 "나 없이 20년 동안 지내느라 고생 많았소. 이제 내 곁에서 편히 지냅시다"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삶이 별거냐. 공수래공수거일 터인데. 곁에 있는 것이 내 것인 양하다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는지. 만나면 헤어지고 또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삶이 아니겠는가. 떠나고 헤어짐에 연연하면 남는 것은 찬바람 솔솔 들어오는 허한 마은 뿐일 것이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지만 인간이 우주에 머문 것은 찰나에 불과한 시한부 휴가가 아닐까. 이제 욕심 내려놓고 휴가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가 보다.


ⓒ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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