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보호' 물결에 석유화학 원료 수요 불가피
석유화학 업계, NCC 매각 추진하며 '脫석유화학' 러시
끝물에 판 크게 벌인 에쓰오일, 에틸렌 180만t 생산능력 추가
#포지티브적 해석 : 환경보호 따져도 비닐봉투는 쓴다. 값싸게 만들면 팔린다.
#네거티브적 해석 : 아무리 그래도 끝물에 9조 투자는 지나치게 용감해 보임.
지구가 많이 아프다는데, 환경보호에 동참하고 계신가요? 어젠 일회용 비닐봉투 몇 장이나 쓰셨나요.
일회용 비닐, 일회용 컵, 일회용기 사용을 줄이는 추세에 큰 영향을 받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바로 ‘비닐’, ‘플라스틱’으로 통칭되는 석유화학 제품 원료를 만드는 기업들이죠.
마침 어제(28일) 국내 대표 석유화학 업체인 LG화학이 3분기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전년 대비 반토막(-42.1%) 수준으로 줄어든 4984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양극재‧분리막 등 배터리 소재를 만드는 첨단소재부문과 배터리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에서 영업이익 전부를 책임졌고, 원래 주력이었던 석유화학부문은 382억원의 적자를 내며 전체 실적을 깎아먹었습니다.
실적발표를 앞둔 다른 석유화학업체들도 아마 형편은 비슷하거나 더 나쁠 겁니다. 업계 2위인 롯데케미칼은 3분기 1000억원대 적자를 냈을 것으로 증권가에서는 내다보고 있습니다.
고가의 설비를 투자해 놓고 원료를 투입해 제품을 끊임없이 뽑아내는 장치산업은 시황 사이클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같은 물성(物性)이라면 LG화학 제품이든 롯데케미칼 제품이든 무관하니 수요가 더 많으면 가격은 뛰고 공급이 더 많으면 가격은 떨어지는 구조죠. 이게 공급자의 설비 투자와 시장의 수요 변화에 따라 수년 단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그걸 시황 사이클이라고 합니다.
다른 때였다면 적자를 조금 낸 들 크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언젠가 시황은 다시 오르게 돼 있고 불황기에 ‘존버’하면 호황기에 바닥 난 곳간을 채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세계적인 환경보호 움직임으로 시장 자체가 석유화학 업체들이 먹고살기 힘든 구조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석유화학 업체들이 만드는 대표적인 제품이 에틸렌, 프로필렌, C4유분과 같은 비닐, 플라스틱, 합성고무 원료입니다. 정유공장에서 원유를 정제해 뽑은 나프타를 석유화학 업체들이 NCC(나프타 분해 설비)에서 쪼개 기초유분인 에틸렌, 프로필렌, C4유분을 만듭니다. 무질서하게 뭉쳐 있는 탄소(C) 덩어리를 2개(에틸렌), 3개(프로필렌), 4개(C4유분)씩 조합하는 과정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들 기초유분은 다시 하류 공정으로 투입돼 중합체(重合體, polymer)로 만들어집니다. 에틸렌 두 개씩 짝을 지어주면 폴리에틸렌(PolyEthylene, PE)이 되고, 프로필렌 두 개씩 짝을 지어주면 폴리프로필렌(PolyPropylene, PP)이 되는 식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일회용품들이 대부분 PE, PP, 혹은 우리가 흔히 ‘페트병’이라 부르는 PET로 만들어집니다. 주변에 있는 비닐봉지를 잘 살펴보시면 자원순환(재활용) 표시와 함께 LDPE, HDPE, PP 등이 적힌 게 보이실 겁니다. LDPE는 PE중에서도 밀도가 낮은 저밀도폴리에틸렌을 말하는데, 잘 늘어나는 얇은 비닐봉투를 주로 이걸로 만듭니다. 말랑말랑하지만 좀 두껍다 싶으면 밀도가 높은 고밀도폴리에틸렌(HDPE)인거고, 비닐 중에서도 재질이 좀 빳빳하다 싶으면 PP라고 보시면 됩니다.
비닐 외에도 우리 주변에 각종 플라스틱 제품들이 PE, PP로 만들어집니다. 요즘 반도체니 배터리니 ‘신종 산업의 쌀’들이 등장했지만, 산업의 쌀 원조는 에틸렌이었습니다. 실제 PE를 보면 쌀처럼 생기기도 했습니다. 소규모 제조업체들은 쌀처럼 생긴 PE를 포대로 사다 원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PE, PP는 친숙하고 흔한 소재지만, 환경오염의 주범이란 오명을 쓴 소재이기도 합니다. 일회용품 줄이기는 대표적인 환경운동이고, 그 일회용품의 원료가 PE, PP니, 이 친구들의 운명도 대충 예상이 되시죠?
물론 비닐봉투를 전혀 쓰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심지어 쓰레기 종량제봉투도 HDPE로 만들어질 정도니)이고 하루아침에 일회용품을 세상에서 지워버리자는 식의 극단적 환경주의에 찬성하지도 않지만, 소비트렌드 변화 때문이든, 각국 정부의 규제 때문이든 장기적으로 PE, PP가 발을 들일 곳이 점점 좁아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범용 석유화학 원료를 만드는 업체들이 ‘존버’ 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거란 얘깁니다.
죽어가는 시장에 매달려 있어 봐야 답이 없습니다. 수천억, 수조원이 투입된 고가의 설비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나겠지만 석유화학 업체들은 하나 둘씩 시장 철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인들 중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관련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온 최태원 회장 아시죠? 그분이 이끄는 SK그룹 산하 석유화학 계열사 SK지오센트릭은 이미 4년 전에 NCC공장 두 곳 중 한 곳의 가동을 멈추고 석유화학 비중을 대폭 줄였습니다. 원래 SK종합화학이었던 사명도 지구‧토양을 뜻하는 ‘지오(geo)’와 중심을 뜻하는 ‘센트릭(centric)’을 조합해 SK지오센트릭으로 바꾸고 플라스틱 재활용 등 친환경 분야를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바꿨습니다.
업계 1위 LG화학도 여수 NCC 2공장 매각을 검토 중입니다. 원래 파는 사람은 매물 가격 떨어질까 봐 팔고 싶단 얘길 잘 안하는데 계속해서 매각설이 나오자 “석유화학 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사업가치 제고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나,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는 없다”고 공시했습니다. 28일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도 같은 취지의 답변을 했습니다. 어쨌든 검토 중인 건 맞단 얘기죠.
롯데케미칼의 경우 석유화학 기초소재 관련 해외법인들을 대거 정리하고 있고, 적자투성이 해외 생산기지인 말레이시아 LC타이탄도 원매자만 있으면 팔아치울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내 4대 정유사 중 한 곳인 에쓰오일(S-OIL)이 기자들을 불러다 세계 최대의 에틸렌 생산설비를 건설 중이라고 자랑한 것이죠. 9조2000억원을 들여 진행하는 ‘샤힌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이 사업을 통해 연간 180만t의 에틸렌 생산이 가능하다고 하니, 전문 석유화학 업체 하나가 새로 생기는 셈입니다.
심지어 에쓰오일은 현재 12.8% 수준인 석유화학 부문의 매출 비중을 샤힌 프로젝트 완공 이후 2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도 밝혔습니다.
다들 석유화학이 끝물이라고 철수하는 마당에 오히려 크게 판을 벌여놓은 이유는 뭘까요.
사실 ‘하필 지금’ 투자를 결정한 건 아닙니다. 2018년 5조원을 들여 진행한 정유 석유화학 복합시설(RUC&ODC) 건설이 마무리되자 후속 투자계획 검토가 시작됐습니다. 최종투자결정(FID)이 이뤄진 건 2년 전인 2022년 11월이었지만, 사업 구상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뤄졌던 셈입니다.
벌써 공사가 40%가량 진행됐고, 2026년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투자계획에서 완공까지 상당한 기일이 소요되는 장치산업의 특성상, 시작과 끝의 시장 상황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는데 분위기 싸하다고 접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석유화학업체와는 다른 정유업체만의 속사정도 있습니다. 앞서 석유화학업체들이 정유업체로부터 나프타를 받아다 기초유분을 만든다고 했죠? 정유업체로서는 자신들이 직접 석유화학 설비를 갖추고 기초유분과 하류제품까지 만드는 게 나름대로 ‘포트폴리오 다각화’입니다.
석유화학업체들에겐 석유화학 사업 비중을 줄이고 비(非)석유화학 사업을 확장하는 게 자랑이지만, 에쓰오일에겐 석유화학 비중을 늘리는 게 자랑인 거죠.
에쓰오일은 샤힌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기술이 비용경쟁력이 상당히 높다는 점도 내세웠습니다. 원유를 정유설비에서 돌려 나프타를 생산하고, NCC에서 나프타를 쪼개 기초유분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TC2C’와 ‘스팀 크래커’라는 설비를 통해 원유와 LPG 부생가스 등에서 직접 기초유분을 뽑아내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공정이 한 단계 생략되면 가격경쟁력은 높아지겠죠.
그럼에도 우려되는 부분은 샤힌 프로젝트에서 새로 쏟아져 나오는 180만t의 에틸렌을 소화할 시장 상황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기존 석유화학 업체들이 NCC를 매각한다고 해도 고철로 팔아먹지 않는 이상 생산능력은 유지될 텐데 말이죠.
아시아 역내 시장은 이미 중국산 저가 석유화학 원료들로 인해 공급과잉이 심해진 상태고, 아세안 국가들도 석유화학 원료 자급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용경쟁력이 높다고 해도 9조원이 넘게 새로 투입된 생산설비와 이미 투자비를 다 뽑아먹은 기존 설비와의 차이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요 감소가 필연적인 시장에서 새로 등장한 샤힌 프로젝트. 이게 에쓰오일을 구원할 동아줄이자, 마지막 남은 수요마저 중국산에 점령당하는 것을 막아줄 버팀목이 될지, 침몰하는 배에 마지막으로 승선하는 사상 초유의 투자 과실(過失)로 기록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