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환율변동, 대외 신인도 하락, 경기악화, 노조리스트 등 악재 잇달아
"밸류업 계획 내놨는데 주식시장 혼란으로 효과 희석" 불만도
주요 기업들 비상대책회의…사업계획 전면 재검토 사례도
3일 저녁부터 4일 새벽 사이 이뤄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및 해제 사태 여파로 기업들도 후폭풍을 맞을 상황에 처했다. 가뜩이나 저성장과 대외 리스크로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계엄 사태까지 더해지며 경영환경이 최악으로 치닫게 됐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4일 재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주가와 환율 변동은 물론, 대외 신인도 하락, 정치적 불안정에 따른 경기악화, 노조리스크 증대 등 여러 악재가 잇따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국회의 결의를 받아들여 계엄을 해제하며 사태가 빠르게 일단락 된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이미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시장에 미치는 후폭풍이 없을 수는 없다. 이미 주가와 환율이 요동치고 있고, 외신에서도 큰 관심을 가진 일이라 수출이나 관광 등의 업종에도 타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코스피는 지수는 전날 대비 49.34포인트(1.97%) 내린 2450.76으로 출발했다. 원/달러 환율도 전날 대비 15.2원 급등한 1418.1원으로 개장하는 등 계엄 여파가 그대로 반영됐다.
이런 상황은 국내 기업들이 그동안 미래 비전 발표,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등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추진 전략을 잇달아 제시해 온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최근 계열사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놨는데 계엄 사태에 따른 시장 불안으로 효과가 희석되게 생겼다”면서 “벌써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량으로 자금을 빼고 있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을 유발했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김윤정 LS증권 연구원은 “비상계엄 직후 환율과 한국 증시 추종 해외 상장지수펀드(ETF)들이 간밤 변동성을 키웠던 만큼 오늘 우리 증시에서도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을 동반한 단기 고변동성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환율 급등으로 원화 가치가 하락하며 기업들의 원자재 조달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제조기업 한 관계자는 “거시적인 환율 변동성이야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지만 이번 계엄 사태와 같은 돌발 상황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원자재 조달 비용 상승으로 인한)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계엄 사태가 한국의 정치 리스크를 부각시키며 대외 신인도가 하락하는 것도 국내 기업들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외신들은 계엄 사태를 비중 있게 다루며 과거 한국의 군부독재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등 부정적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영국 BBC는 이날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대해 “독재 시대 이후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발전을 이룬 한국을 놀라게 했다. 수십 년 만에 민주사회에 대한 가장 큰 도전으로 여겨지고 있다”면서 “전문가들 또한 이번 사태가 ‘민주주의 국가’ 한국의 평판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고 보도했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글로벌 무대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으로서 본진인 한국의 평판이 하락하는 게 좋을 리 있겠느냐”면서 “군인들이 무장한 채 국회로 진입하는 모습이 해외에 보도된 것만으로도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대통령 탄핵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치 상황이 불안해지는 상황도 기업들에게는 리스크 요인이다. 특히 강성 노조가 교섭권을 가진 사업장은 노조 리스크에도 대비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이날 오전 중앙집행위원회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권 퇴진 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당장 산하 사업장별 파업 지침이 나오진 않았으나 사태가 심각해지면 일부 기업들은 조업 차질에 휘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날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는 문용문 지부장 명의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윤석열의 비상계엄령 소식에 상무집행위원 전원 비상대기에 돌입했다”면서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윤석열이 받아들였지만 위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한 행위는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전포고이기에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이날 오전부터 계엄 후폭풍 관련 대책 마련을 위해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SK그룹은 이날 오전 최창원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관으로 주요 경영진이 참석하는 대책 회의를 열고 비상계엄 사태가 시장 및 그룹에 미칠 영향을 논의했다.
HD현대그룹은 새벽 일찌감치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오전 7시30분 권오갑 회장 주재로 사장단 회의를 열고 앞으로 발생 가능한 사업환경 변동 상황을 집중 점검하는 한편 각 계열사별 대응 전략을 수립하기로 했다.
권오갑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각사 사장들은 비상경영상황에 준하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특히 환율 등 재무리스크를 집중 점검해 달라”고 주문했다. 또 “조선 등 생산현장에서는 원칙과 규정 준수에 더욱 유념해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 달라”고 당부했다.
카카오는 이날 오전 정신아 대표이사를 포함한 카카오 CA협의체(컨트롤타워) 경영진이 모인 가운데 계엄 사태가 향후 경영 활동에 미칠 영향 등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비상경영회의를 열었다.
다른 주요 대기업들은 경영진 회의는 없었지만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그룹 차원의 대책회의 등 별도의 공지는 없었지만 각 계열사와 사업부문, 사업부 별로 상황이 다른 만큼 개별로 대책회의를 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일단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실질적인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우린 수출기업이기 때문에 환율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환율 변동과 관련해서는 환 헤지, 통화 다변화 등 대응 매뉴얼이 있는 만큼 침착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기업들은 이번 계엄 사태로 인해 내년 사업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통상 12월이면 임원인사를 마치고 새해 사업계획을 짜놓는데, 막판 돌발 변수로 인해 대폭 수정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경제성장률과 환율 등 거시경제 요인이나 국내외 정치적 변동성은 새해 사업계획 구상의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면서 “그런 부분들이 크게 바뀌면 사업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는 사례도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