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세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아테네올림픽 때)왕하오를 꺾고 금메달을 따낸 것처럼 예상을 깨보겠다. 나의 진정성이 전달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유승민(43) 당선인의 후보 시절 발언은 현실이 됐다.
유승민 후보는 14일 서울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실시된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유효 투표 1209표 중 417표를 얻어 당선됐다. 이번 선거에는 회원 종목단체와 시·도 및 시·군·구 체육회 소속 임원, 선수, 지도자, 심판 등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2244명 중 1209명이 참여해 투표율 53.9%를 기록했는데 유 당선인은 34.5%를 득표했다.
21년 전 아테네올림픽 못지않은 이변을 연출했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반 이기흥’ 단일화 불발과 현역 프리미엄 등으로 당선이 유력시됐던 이기흥 현 회장은 379표를 얻어 2위에 그쳤다. 2016년 통합 체육회장으로 당선되고 2021년 재선에 성공했던 이기흥 회장은 예상 밖 결과를 받아들고 3연임에 실패했다.
지난 8년 동안 대한체육회장을 지내며 다져온 지지층을 확보한 이기흥 후보의 3선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체육 대통령’에 등극한 것에 대해 유 당선인은 "체육인 여러분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화답하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하겠다"며 "나의 진정성을 보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고, 순수한 마음으로 같이 뛰어주셨다. 내가 더 책임감을 갖고 앞으로 더 정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체육계 관계자들은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온 것을 놓고 “유승민 후보의 포기하지 않는 승부사 기질, 개혁 이미지와 세대교체론, 그리고 이 회장 사법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린 것”이라고 말한다.
유 당선인은 ‘반 이기흥’ 단일화 실패로 낙선이 유력했던 후보다. 판세가 불리해도 끝까지 발로 뛰면서 체육인들을 만나 진정성을 담아 개혁을 외쳤다. 일부 후보 측의 ‘아직 젊은데 다음 선거를 노리고 단일화의 밀알이 되어달라’는 제의를 뿌리치고 선거를 완주해 승리를 거뒀다. 2004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결정전에서 이전까지 6전 전패(상대전적)로 밀렸던 왕하오를 상대로 끝까지 투지를 보여준 승부사 기질이 이번에도 통한 셈이다.
또 배드민턴 안세영 ‘작심 발언’ 등을 타고 지난해 수면 위로 올라온 체육계 부조리나 잘못된 관행들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표심이 각종 비위 혐의 등 부정적 이슈에 둘러싸인 이기흥 회장보다 유 당선인에게로 흘렀다. 선거 운동 기간 막판에는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유 후보의 참신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훼손하지 못했다.
체육계 관계자는 “유 후보의 능력이나 이미지도 분명 표심에 영향을 미쳤지만, 이 회장 사법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린 결과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기흥 후보는 회장 시절에 정부와의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대립각을 세우면서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로 인해 국민적 여론은 악화됐고, 체육계 관계자들의 피로도도 높아졌다.
여기에 각종 비위 혐의에 대해 투표 당일에도 결백을 주장했지만 “당선 되더라도 사법 리스크가 우려된다”는 반응을 잠재우지 못했다. 이기흥 후보는 선거 기간 문체부의 직무 정지 처분에 두 차례 집행 정지를 신청했지만 법원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자 이 후보의 지지층이라 여겼던 직무정지 처분에 대해 이 후보 측이 두 차례나 집행정지를 신청했지만 법원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놓고 이 회장 지지층이라고 여겼던 시도협회장-경기단체장들 사이에서 “(이 회장이)당선되더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러다 체육계 전반으로 더 깊은 수사 압박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며 이탈표가 발생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승민 당선인의 개혁적 색깔과 이기흥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교차하면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 모양새다.
낡은 리더십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이 회장 체제와 달리 유 당선인은 문화체육관광부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도 "아직 누구와 척을 진 적이 없다"며 "부드럽게 잘 풀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유 회장의 새 임기는 2029년 2월까지다. 임기 중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 LA 하계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줄줄이 펼쳐진다. 한국 선수단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 체육계 내 부조리와 병폐 등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며 약속했던 개혁의 속도를 높이고 미래를 밝힐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