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본시장 최대 3조6000억 유상증자 '후폭풍'
회사 “글로벌 방산 경쟁서 선제 투자 필수적” 강조
“현금 충분하다더니…” 갑작스런 결정에 주주 반발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국내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인 3조6000억원의 유상증자를 결정하면서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회사가 최근 한화오션 지분을 사들이며 자본 조달 계획이 없다고 설명했던 만큼 주주들 사이에서는 갑작스러운 초대형 증자 계획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이번 유상증자 결정 이후 시장에선 투자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 20일 이사회를 열고 3조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의했다. 새로 발행되는 주식(신주)은 총 595만500주로 전체 발행주식 수의 13.05%에 해당하며 발행가액은 60만5000원으로 15% 할인된 금액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이번 유상증자로 확보한 자금을 해외 방산 거점 구축(1조6000억원), 국내 방산 시설 확충(9000억원), 해외 조선소 투자(8000억원), 무인기 엔진 개발(3000억원) 등에 투입할 계획이다.
회사는 글로벌 방산·조선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 투자라고 강조했다. 시장이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이번 투자를 놓칠 경우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 최근 미국 필리조선소 인수에 이어 호주 오스탈의 지분 투자 등을 추진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그러나 투자 명분에도 불구하고 업계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충분한 투자 여력을 갖추고도 주식 가치가 희석되는 유상증자를 선택한 배경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은 11조4200억원으로 전년 대비 42% 늘었고 영업이익은 1조7319억원으로 191% 급증했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도 약 3조원을 보유 중이다. 회사는 이번 자금이 즉시 집행되지 않고 3~4년에 걸쳐 투자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간 투자 금액을 감안하면 자체 자금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증권가에서도 이번 결정에 의문을 표하며 투자의견과 목표주가를 하향 조정했다. 다올투자증권과 DS투자증권, 삼성증권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투자의견을 기존 ‘매수(BUY)’에서 ‘중립(HOLD)’으로 낮췄다.
정동익 KB증권 연구원은 “매년 영업활동에서 창출되는 현금 흐름만으로도 충분한 투자 규모인데 유상증자를 선택한 것은 기존 주주에게 아쉬운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서재호 DB금융투자 연구원 역시 “앞으로 2년간 약 5조원의 EBITDA(상각전영업이익)가 전망되는데도 증자를 단행해 주주들의 우려가 높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글로벌 투자은행(IB)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결정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BoA는 “자본 조달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주가 조정은 매수 기회”라며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목표가를 기존 70만원에서 82만원으로 상향 조정하고 매수 의견을 유지하는 등 회사의 전략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다만 갑작스러운 대규모 유상증자 발표 이후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다. 지난 20일 72만2000원에 장을 마감했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하한가(65만원)까지 떨어졌고 21일 정규장에서도 10% 이상 급락했다.
특히 주주들은 최근 한화오션 지분 인수 과정에서의 자금 활용 방식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한화에어로는 지난달 김승연 회장 일가가 지배하는 계열사들로부터 한화오션 지분 1조3000억원어치를 사들이며 “자본 조달은 영업 현금 흐름으로 충분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주주들은 회사가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던 한 달 전과 달리 입장을 번복한 점을 문제 삼으며 “결국 총수 일가의 부담을 회사가 떠안고 그 비용을 주주들에게 전가한 것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이번 유상증자로 불거진 시장의 의구심과 주주 반발을 잠재우려면 글로벌 방산·조선 분야에서 확실한 투자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성과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회사에 대한 신뢰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