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생활과 밀접한 유통업, 정치권 포퓰리즘 대상으로 전락
유통업 규제 및 정부 자금 1조원 투입에도 전통시장 매출액 3.7% 증가에 그쳐
“유통산업발전법이 유통산업의 발전을 위한 법인지, 아니면 발목을 잡기 위한 법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갈수록 강화되는 규제로 유통업계에서는 이런 푸념이 자주 나온다. 말만 ‘발전’법이지 실상은 ‘발목’법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업계에서는 많이 들린다.
1997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통산업발전법은 제정 당시에는 이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제1장 제1조 법안의 목적 부분을 보면 ‘유통산업의 효율적인 진흥과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고, 건전한 상거래질서를 세움으로써 소비자를 보호하고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개정 과정이 잇따르면서 현재는 유통업계의 발목을 잡는 규제법으로 변질됐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소비자 생활과 가장 밀접한 유통산업은 정치권에서도 포퓰리즘으로 활용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독 부침도 많았다. 그 결과 법안의 목적으로 내세운 유통산업의 발전과 소비자 보호, 국민경제 발전 3가지를 모두 놓쳤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으로 2010년 11월에는 전통상업보존구역 지정 제도가 신설됐고, 전통시장 경계로부터 500미터 이내에는 대형마트나 SSM 출점이 금지됐다.
이듬해인 2011년에는 전통상업보존구역 지정 범위가 기존 500미터에서 1킬로미터로 확대됐고, 2012년 들어서는 대형마트와 SSM의 영업시간 제한(00~08시) 규정이 신설됐다. 의무휴업일 규정이 생긴 것도 이 때다.
2013년에는 영업시간 제한이 오전 10시로 연장됐고, 의무휴업일도 매월 2회로 명시됐다. 규제가 보다 더 강화되면서 대형 유통업체들의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영업제한이나 휴업 등 직접적인 제재에서 벗어나 신규 출점 기준을 강화하는 쪽으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또 대형마트와 SSM에 이어 복합쇼핑몰에 대해서도 규제를 확대 적용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2010년 들어 유통업계에 대한 규제가 대폭 강화됐지만 전통시장이 크게 수혜를 본 것도 아니다. 전통시장 활성화라는 당초 규제의 명분도 살리지 못한 셈이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발표한 ‘전통시장·상점가 및 점포경영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전통시장 당일 평균 매출액은 2013년 4648만원에서 2016년 4988만원으로 약 3.7%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루 평균 전통시장을 찾는 소비자 수는 4170명에서 4486명으로 약 3.2% 늘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4.0%인 점을 감안하면 전통시장 매출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특히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정부가 전통시장 현대화와 시장경영혁신 등에 총 1조1538억원을 쏟아부은 것을 고려하면 대형 유통업체 규제를 통해 얻은 실익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이 때문에 전통시장 등 소상공인들 사이에서도 정부 규제나 지원이 전통시장을 살린 게 아니라 전통시장의 임대료만 끌어올려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유통산업법의 제정 목적으로 명시됐던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대형마트나 SSM의 영업시간이 단축되고 의무휴업 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민들의 소비 활동은 더 불편해졌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의 소비활동이 제한된 것이다. 특히 주말에 일주일치를 몰아서 장을 보는 맞벌이 가구는 불편함이 더 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발표한 전통시장을 잘 안 가는 이유에 대한 답변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주차 불편, 편의시설 부족, 교통 불편 등이 주요 이유로 꼽힌다.
최근 폭염이 계속되면서 전통시장 기피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복합쇼핑몰을 비롯해 대형마트, 백화점에는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매출이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전통시장은 오히려 손님 구경을 하기 힘들 정도다.
그동안 정부가 1조원이 넘는 돈은 이 같은 편의시설 개선에 투입했지만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었던 셈이다.
규제 강화로 유통산업 전반이 침체되면서 일자리 감소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대통령과 정부가 유통산업을 대규모 고용산업으로 인정하고 일자리를 늘려줄 것을 업계에 요구했지만 업계는 규제 탓에 오히려 일자리 감소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결과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에 따라 영업시간 제한 확대와 신규 출점 규제로 인한 유통업계 일자리 감소폭이 한 해 최소 9836개에서 최대 3만5706개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형마트의 경우 매장 1곳이 300~500명을 신규 고용하고, 대형 백화점과 복합쇼핑몰은 5000여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를 갖고 있다. 하지만 주요 백화점 3사는 물론 대형마트 3사에서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신규 출점 계획의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전통시장과 골목상권 활성화를 위해서라면 무작정 대형 유통업체에 대한 규제만 할 것이 아니라 상생 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며 “현재 이마트 상생스토어 등 다양한 상생 모델이 운영되고 있다. 상생 모델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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