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은, 극지의 지옥에 떨어진 태양처럼, 한낱 얼어붙은 살덩이에 지나지 않으리라'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시잡 ‘악의 꽃’ 속 ‘가을의 노래’ 시 구절이다. tvN '악의 꽃' 속 도현수(이준기 분)의 ‘태생부터 얼어붙은 심장’과, 도현수의 비밀을 알아챈 아내 차지원(문채원 분)의 ‘얼어가는 심장’이 연상시킨다.
'악의 꽃'은 사랑마저 연기한 남자 백희성(이준기 분)과 그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아내 차지원이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 마주선 이야기를 그렸다.
현재 차지원은 백희성이 연쇄살인마 도민석(최병모 분)의 아들 도현수란 비밀을 알았고, 자신이 알던 남편의 실체가 거짓이란 사실에 절망했다. 또 이장 살인사건의 진범은 도현수가 아닌, 누나 도해수(장희진 분)였고, 도민석에게 공범이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악의 꽃'은 과거 가촌리 연쇄살인과 이장 살인사건을 뼈대로 하고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추적극에서 심리전을 더한 스토리로 확장해가면서 묘미를 더하고 있다.
백희성이란 가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도현수와, 이 모든 사실을 알지만 속내를 숨기는 차지원의 속고 속이는 설정이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배우들의 표정이나 대사 한 줄이 서스펜스와 멜로를 오가며 두 장르 모두를 소홀하지 않게 끌어가고 있다.
‘악의 꽃’ 제작발표회 당시 김철규 PD는 "역동적이고 유니크하며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9회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현재, '악의 꽃' 조각들이 맞춰지며 김 PD의 이유 있는 자부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진짜 백희성(김지훈 분)의 존재다. 백희성은 과거 도현수를 차로 들이받은 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왔다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한 건 도현수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건 백희성으로, 공개되지 않는 그의 사연에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또 하나는 도민석 공범의 존재다. 도현수, 차지원이 잡으려는 공통의 인물인 만큼 갈등을 겪었던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악의 꽃'이 웰메이드 타이틀을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 이준기 역할이 크다. 누나를 위해 누명을 쓴 도현수, 금속도예가 백희성, 차지원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는 백희성, 연쇄 살인마이자 아빠의 공범을 찾는 도현수 등 이준기는 도현수와 백희성을 오가며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이준기는 도현수가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평범한 인물과는 다른 지점을 둬야했다. 그 지점이 바로 '공부로 배운 감정'이다. 감정을 모르는 인물이기에 사람의 표정, 눈빛, 말투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연습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생존을 위해 가면을 쓴 도현수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는 표정을 능숙하게 보여준다. 진짜보다 더 진짜인 가짜인 셈이다.
촘촘한 감정선을 가져가면서도 날렵한 액션까지 가능한 이준기는 MBC '개와 늑대의 시간', '투윅스',tvN '크리미널 마인드' 등 장르물에 특화된 배우다. 이준기는 '악의 꽃' 출연 전 자신의 연기가 자가복제가 될까 우려했다. 하지만 뚜껑을 연 드라마에서 이준기는 그 동안의 연기를 집약한 밀도 높은 연기로 시청자를 즐겁게 하고 있다.
현재 '악의 꽃'은 극본, 연출, 배우까지 3박자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지만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지난 24일부터 31일까지 제작이 중단된 상태다. 이에 9월 2일은 정상 방송 되지만 3일은 스페셜 방송으로 대체된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격렬한 감정들이 오가며 긴장감이 최고조에 오른 후반부 초입에 이 같은 휴방이 '악의 꽃' 몰입을 떨어뜨릴 수 있어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