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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메모리즈③] 여자 배우로 산다는 것, 줄리엣 비노쉬의 바지


입력 2020.11.13 08:21 수정 2020.11.13 08:21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줄리엣 비노쉬. 영화 '엘르' 스틸컷 ⓒ㈜미디어데이 제공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프랑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는 연예계 안팎의 민낯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ASK라는 연예기획사를 배경으로 프랑스 유명 배우들이 매회 주인공으로 등장, 그들의 일과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매니저들의 활약을 그린다. 과연 한국판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만큼 솔직하다. 특히 각 배우의 실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내용을 보노라면, 자유와 예술의 분위기가 짙은 프랑스여서 가능한 드라마라는 생각마저 든다.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출처=네이버 블로그 'ABOUT FRANCE'

현재 시즌3까지 공개돼 있고, 각 시즌에는 6회분이 담겨 있다. 시즌2의 마지막 회 제목은 ‘줄리엣 비노쉬의 드레스’이다. 극중 줄리엣 비노쉬는 제69회 칸국제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맡게 되는데, 드레스가 아닌 바지 정장을 입길 원한다. 하지만 심사위원인 중국 배우 공리가 턱시도를 입기로 했다면서 영화제 주최 측은 비노쉬에게 드레스를 권하고, 비노쉬는 치렁치렁 흰색 드레스를 입게 된다.


또, 질리에르그룹의 회장이자 프랑스 미디어의 반을 가지고 있는 장-드니 쥘리에르는 팬을 자청하며 당장 만나자고 호텔 1층으로 찾아오는가 하면 매니저를 통해 거절하자 무턱대고 요트에서의 식사를 청한 뒤 마치 확정된 약속인 것처럼 거대한 꽃바구니와 초청장을 보낸다. 비노쉬는 거절의 뜻을 밝혀도 알아듣지 못하는 끔찍한 사람이라며 어떻게든 피하려 하지만 막무가내다. 이런 곤경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적인데 쥘리에르의 친구라는 연로한 여성 인사는 되레 매니저에게 내일(요트에서의 식사일)만 모면하면 되느냐, 그다음엔, 10년 후엔 어떻게 할 거냐면서 질리에르가 비노쉬의 영화를 다 망쳐 놓을 수 있다, 연출하는 영화에 투자도 받아야 하지 않느냐, 적게 주면서 많이 주는 척하는 거라고 회유와 협박을 가한다.


회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매니저마저 곁에서 지켜보겠으니 요트에 가자고 말하고, 끈덕진 추파에 비노쉬는 불쾌감을 느낀다. 결국 비노쉬는 정면돌파를 택한다. 영화제 복도에서 마주친 쥘리에르가 “이 무슨 숨바꼭질도 아니고”라며 얼굴 한 번 못 본 서운함을 표하자 벽으로 밀어붙여 공격적으로 들이밀며 “대신 아내와 나눠 가질 수 없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하자”며 한술 더 뜬다. 이제 질리에르 회장은 배우 비노쉬를 포기할까. 비노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전히 모를까.


'줄리엣 비노쉬의 드레스' 편의 칸영화제 개막식 장면 ⓒ출처=네이버 블로그 'ABOUT FRANCE'

칸 개막식의 무대가 오르고 비노쉬는, 방금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면서 경쟁부문에 12편의 여성 감독 연출작이 진출한 것을 축하하는 인사를 건넨다. “오늘날에도 여성의 몸은 권력 싸움과 갈등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영화계에서도 많은 제약이 따르죠, 여성이 경험하고 상상하는 것에요”라고 말하며 여성의 관점과 여성의 생각을 펼쳐 보일 필요가 있다, 여성 영화인들을 응원한다고 말하며 개막을 선언한다.


‘줄리엣 비노쉬의 드레스’ 편에는 빙산의 일각이지만 여자 배우로 산다는 것의 힘겨움이 담겨 있다. 하물며 세계적 유명 배우 줄리엣 비노쉬, 연기 잘하기로 정평이 난 배우마저도 이런 일을 겪거나 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보다 못한 처지의 여자 배우는 어떻다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 '데미지' 스틸컷 ⓒ㈜예지림 엔터테인먼트 제공

드라마 속 얘기만이 아니다. 2018년 2월 줄리엣 비노쉬는 프랑스 르몽드와 인터뷰했고, 이 내용을 국내 영화전문잡지 씨네21이 전재해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말을 부분부분 발췌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옮겨 실었던 것이기에, 비노쉬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장 그대로를 소개하지 못하고 제목처럼 기억에 의존해 대략 살펴보면 이렇다.


당시는 미국 할리우드 제작자 와인스타인에 대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가 연이어 터진 후였다. 줄리엣 비노쉬는 자신 역시 배우 18세 신인배우 시절 몸을 덮치며 키스하려는 감독, 21세 때 발정 난 개처럼 덤벼든 제작자를 경험했고 한밤중에 전화를 해대다 못해 연락도 없이 집 앞에 온 남자 배우를 현관 앞에서 못 들어오게 막아 쫓아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테이블 아래서 종아리를 치며 보내는 신호를 모른 척하거나 전화번호를 준 사람에게 연락하지 않아 리허설까지 마치고도 배역을 잃은 일들도 얘기했다. 비노쉬는 이런 난관 속에서도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찾고자 하고 원하는지 등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게 배우이며, 그러한 고심 속에서도 무대 위에 오르면 몸과 영혼을 모두 내어 주어야 하는 게 배우라는 직업임을 말했다.


이때 비노쉬는 자신에게는 상대의 속성을 알아채는 직관이 발달해 있고, 그래서 미리 피하거나 완강히 거부해 왔다고 말했다. 신인 배우이거나 마음이 약한 사람은 쉽지 않은 저항이라고 말했지만, 마치 아픈 경험을 당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번역된 글을 봤기 때문에 비노쉬가 한 말의 뉘앙스나 행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비노쉬가 저항하지 못한 여성들을 비난하기 위한 인터뷰거나 말들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노쉬는 예전에 잡지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자신이 어떻게 발달된 직관을 갖게 됐는지를 다시 한번 밝혔다. 7세 때 남자 선생이 몸을 만졌고, 그때부터 비노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바지를 입고 다녔다. 같은 일을 당한 친구가 비노쉬에게 털어놓았고, 비노쉬도 엄마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스스로 위험에서 멀어지게 하고, 남자라 눈감아주는 성적 행위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는 등 지난한 학습시간을 통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동했음에도 분노를 느꼈고 상처로 남았다고 말했다.


영화 '여름의 조각들' 홍보 차 내한한 줄리엣 비노쉬 ⓒ영화사 구안 제공

이 인터뷰가 생각난 건,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에피소드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바지를 입으려고 하는 대목, 영화계 파워맨의 추근거림에 곤혹스러워하고 분노하다 정면 대응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전혀 연관성 없는 연상일지 모르지만 일곱 살 아픈 기억 이후 바지를 입고 다녔다는 소녀, 탁월한 감성 연기를 통해 세계적 배우로 성장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위협적 환경. 그나마 다행인 건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하는 비노쉬 자신의 대응력이 향상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연상 또 하나. 연이어 터진 성추문 미투로 활동을 중단했던 남자 배우가 최근 복귀를 알렸다. 곧 영화도 개봉한다. 영화에 출연한 동료 배우들, 제작한 스태프, 투자하고 배급한 관계자들에게도 영화를 개봉할 권리가 있고 함께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밥벌이는 엄중한 일이다. 해당 영화의 흥행, 해당 배우의 계속적 활동은 대중에게 달려 있다. 자연스럽게 드러날 결과이고 시간이 답을 줄 것이다. 다만 경찰이 내사로 사건을 종결하고 ‘무혐의’ 처분했다는 것이 곧바로 미투를 외쳤던 연극배우를 비롯해 여러 피해자의 말이 거짓말이 되는 ‘등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밥벌이가 엄중하듯, 피해자의 상처가 존중받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세상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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