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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㉑] CG 없는 ‘손맛 SF’, 불운의 걸작 ‘브라질’


입력 2020.12.07 01:10 수정 2020.12.07 08:34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스틸컷. 정보국의 모습 ⓒ 이하 출처=네이버영화 '브라질'

살아서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가 허다하듯 개봉 당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불운의 걸작들이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리들리 스콧 ‘블레이드 러너’(1982)와 함께 SF 걸작으로 불리는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브라질’(1985)이다.


‘피셔 킹’ ‘12몽키즈’ ‘그림형제-마르바덴 숲의 전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연출하기 전, 테리 길리엄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었던 영화가 ‘브라질’이다. 영화는 연대와 장소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정부와 정보국이 개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고, 사람을 믿기보다 서류와 도장을 믿으며, 잘못된 서류로 사람이 죽는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서류로 합법화할 수 있는 곳이다. 정보에 대한 통제는 당연히 개인의 자유 통제로 귀결된다. 사람보다 서류가 우위에 있는 미래도시, ‘브라질’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담은 디스토피아 작품이다.


기본 골격을 두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연상한 독자가 많을 것이다. 실제로 테리 길리엄 감독 또한 철학적 측면에서 ‘1984’를, 영화의 표현과 스타일 면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1984 1/2’을 영화 제목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1년 앞서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1984’(1984)가 개봉하면서, 다시 작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길리엄 감독은 영화의 주제곡, 브라질 출신의 아리 바로쏘가 작곡한 ‘Aquarela Do Braziliera’(아쿠아렐라 도 브라질)에서 제목을 따왔다.


무엇을 주문해도 색깔만 다른 사료 같은 음식을 갖다 주는 레스토랑 ⓒ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식이 됐지만, 노래를 들으며 영화를 보노라면 어쩐지 ‘브라질’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길리엄 감독이 그려낸 미래 생활양식이 모든 게 낯선 우주적 이미지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혼재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치 산업혁명 당시의 증기기관과 기계가 특화돼 살아남고 나머지는 황폐해진 미래 모습을 보여 주는 디젤펑크 식 디스토피아처럼. ‘브라질’에도 고풍스러운 건축양식과 인테리어, 유선전화와 타자기, 중절모와 트렌치코트, 화려한 장식이 달린 모자와 드레스, 살롱문화와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전통요소가 있는가 하면 아침이면 토스트와 커피를 자동으로 내주는 기계, 전신성형으로 영원한 젊음을 꿈꾸는 사람들, 정보에 의해 개인의 사생활이 통제되는 시스템과 같은 미래 요소가 공존한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할 것 같고, 가까우면서도 멀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남미의 브라질, 똑 부러지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왜 제목이 브라질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잘 지은 제목이다 싶다.


정보국 내의 '이단아' 샘 라우리 ⓒ

이야기의 주인공은 샘 라우리(조나단 프라이스 분)이다. 정보국 정보기록부에서 일하고 있고, 일상업무에 어려움을 겪는 부장을 음으로 양으로 도우며 총애를 받는 덕에 지각해도 게을러도 대략 잘 지낸다. 그러한 현재 상황에 대만족, 돌아가신 아버지의 후배이자 어머니의 친구인 정보국 차관이 잘 나가는 정보검색부로 승진시켜 준다 해도 마다하는 인물이다. 늘 똑같은 꿈을 꾸는데 은색 갑옷에 날개를 단 채 위험에 처한 아름다운 여성을 구하려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샘은 정보국의 실수 하나를 알게 된다. 아치볼드 ‘터틀’(로버트 드 니로 분)을 체포해야 하는데 아치볼드 ‘버틀’을 잡아 왔다. 필사적으로 쫓는 직원에 의해 타자기 위로 떨어진 바퀴벌레의 잔해에 의해 이름 철자가 바뀐 탓이다. 정보국 직원들은 천장을 뚫고, 창문을 깨트리고, 대문을 부수며 들어와 막무가내로 사람을 체포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 검색과 출동, 체포에 쓰인 모든 비용이 가족에게 청구된다. 버틀의 아내는 영문도 모른 채 남편을 잃고, 잡혀가는 아빠를 보며 우는 아이들을 안은 채 청구서에 사인해야 한다. 정보국 경찰은 잘못을 덮기 위해 버틀을 저 세상으로 보낸다. 그야말로 암울한 미래, 디스토피아다.


서류와 도장을 거부하는 아치볼드 터틀 ⓒ

끔찍한 디스토피아에도 인간미를 지닌 사람, 희망은 존재한다. 우선 정부가 체제전복 범으로 규정한 아치볼드 터틀, 그는 사람들의 에어컨이나 배관 고쳐 주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센트럴 서비스에 아무리 전화해도 순번과 서류를 얘기하는 사이 전화를 엿들은 터틀은 자발적으로 그 집에 와서 수리해 준다. 하지만 서류와 도장 없이 한 수리이므로 불법이고, 이것은 반역으로 간주한다. 샘의 에어컨이 고장 났을 때 도와주면서 인연이 닿는다.


그리고 샘 ‘꿈속의 여인’ 질 레이튼(킴 크리스트 분), 그는 트럭운전사로 버틀의 윗집에 사는데 잘못된 체포를 목격했다. 버틀 여사와 아이들이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질은 정보국을 찾아가 체포의 오류를 주장하며 내 일처럼 앞장선다. 하지만 서로 우리 일이 아니라고 미루는 공무원들, 도장이 없다는 답답이들 앞에서 좌절한다. 정보국 오류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질은 테러리스트로 규정돼 체포 대상 명단에 오른다.


꿈에서 먼저 만난 샘 라우리와 질 레이튼 ⓒ

정보국에서 불법 체포에 관해 항의하는 질을 승강기 안의 샘이 발견한다. 현실에서 꿈속 여인을 만나다니, 단숨에 달려가고 싶은데 승강기가 샘의 맘을 몰라 준다.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샘은 여인의 이름 등에 대해 알고 싶어 마다하던 정보검색부로의 승진을 자청한다. 말이 정보검색부일 뿐, 컴퓨터 하나 없는 좁디좁은 사무실. 샘은 우여곡절 끝에 질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는데, 아뿔싸 바로 오늘이 체포 예정일, 혼비백산 꿈속처럼 여인을 구하러 출동한다. 샘은 현실에서도 여인을 구하고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테리 길리엄 감독은 디스토피아 영화답게 비극적 결말로 영화를 운전했다. 미국 국내 배급을 맡은 유니버셜스튜디오는 영화가 너무 긴 것(142분)도, 새드엔딩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작비를 60%만 주고 중단했건만 길리엄 감독은 끝내 완성했다. 유니버셜스튜디오는 영화를 94분으로 자르고 해피엔딩으로 바꿔 TV에 먼저 방영했으나 화제가 되지 않았다. 감독의 일관된 흐름과 철학이 뚝뚝 끊기고 증발된 영화를 어느 관객이 좋아하겠는가. 길리엄 감독은 142분 그대로 LA비평가협회에 출품했고 협회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브라질’에 수여하며 올해의 최고 영화임을 인증했다. 덕분에 해외 배급을 맡은 이십세기폭스는 142분 감독 버전으로 유럽에 먼저 개봉했고, 유니버설스튜디오도 10분만 자른 132분짜리로 극장 개봉했다. 현재 국내 왓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감독 버전이다.


시스템 안의 괴물과 그 통제를 벗어난 인간 ⓒ

그런데 정말 비극이기만 한 걸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국가가 개인의 정보를 통제하고 신체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을진 몰라도 상상의 자유, 정신의 자유는 통제하고 박탈할 수 없음을 선명하게 확인시킨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디지털 시스템의 패배, 아날로그 인간 사유의 승리 아닐까. 이런 일에 승리를 운운하는 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영화 ‘브라질’이 아날로그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가 제작된 1980년대 중반, 별다른 컴퓨터그래픽(CG)이 없던 시절. 테리 길리엄 감독과 제작진은 카메라 각도, 조명과 그림자를 이용해 샘이 일본식 갑주를 입은 거대 악에 맞서는 장면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모습처럼 실감 나게 구현했다. 디지털효과 없어도 땅속에서 거대 기둥이 솟고 대형 빌딩이 폭파되고 건물이 무너지고 다양한 괴수들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를 박진감 넘치게 표현했고, 할머니가 아가씨가 되는 마법을 부렸다. 샘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질이 철창에 갇힌 채 공중을 떠도는 모습도 실감 난다.


나는 상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와, 35년 전에 저걸 어떻게 저렇게 연출한 걸까’, 굉장함에 놀라 저절로 찬사가 나온다. 영화는 사진들보다 훨씬 화질이 좋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수시각효과상, 프로덕션디자인상을 받은 이유가 보인다. 영화를 보며 머릿속으로 ‘이 없으면 잇몸으로’ 일궈낸 멋진 연출 방법을 스스로 감독이 되어 추측해 보는 것도 ‘브라질’의 또 다른 재미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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