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여성의 80%가 외롭다.”
영화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의 주인공 오드리 우즈(줄리안 무어 분)가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다 결국 인정하는 말이다.
평소엔 잘도 지내다가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짝이 없다는 게 외롭다 못해 서럽다. 남녀불문, 청춘일수록 더하다. 그렇다고 갑자기 크리스마스용 일회성 애인을 만들 수도 없잖은가. 서른다섯 살, 오래도록 싱글인 변호사 오드리가 어떻게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지를 지켜보며 내년 크리스마스엔 커플로 보낼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게다가 영화는 보는 내내 웃음이 나는 로맨틱 코미디니까 크리스마스를 시즌을 보내는 방법으로 나쁘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감독 피터 호윗, 수입 쇼타임, 배급 코리아픽처스, 2004)이 특별하게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엄마 인생에 질려 연애에 담을 쌓은, 성공에 목숨 거는 오드리가 있고 그런 오드리의 마음을 흔들 남자가 있고, 그 남자도 예상하다시피 변호사다. 일밖에 모르는, 변론도 법전대로 하는 정석의 오드리가 일터 아니면 어디서 남자를 만나겠는가.
남자 변호사 다니엘 레퍼티(피어스 브로스넌 분)는 미남이지만 옷을 털털하게 입고 재판 시작 전엔 입 벌리고 잠까지 자는 약간 나사 빠진 모습이지만, 재판에 진 적 없는 무패의 전사다. 관찰력도 좋아서 사랑 대신 당분에 빠진 오드리 입가에 묻은 스노우볼 과자 부스러기를 떼주고, 슬렁슬렁 사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책도 내고 TV에도 출연하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다. 승부욕 강한 오드리를 자극하고도 남는다.
주인공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로 일하자고 만나 사적인 자리로 이어지는, 그것도 아주 특별한 술을 마시는 자리로 삼는 것이나 경계심을 늦추는 축제에서 마을 전통주를 마시며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하게 하는 것 등 로맨스영화의 익숙한 문법이 등장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끝에 가보면 다른 쪽이 더 좋아하게 돼 있거나 사소한 오해나 배신의 감정이 위기를 만드는 것도 같다. 주로 줄기차게 사랑을 표현하던 쪽이 위기를 만들고 내내 콧대를 세우던 쪽이 이해와 용서로 마음을 열면 위기가 해결된다.
그런데, 그래서 나쁘냐고? 결코,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노래를 또 듣고, 맛있게 먹었던 걸 또 찾듯이 익숙함은 영화를 편히 즐기게 한다. 머리 아플 것도 없고 그저 하하 호호 즐기면 된다. 그뿐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의 미덕은 바로 배우들에 있다.
‘디 아워스’ ‘파 프롬 헤븐’ ‘눈먼 자들의 도시’ ‘클로이’ ‘싱글맨’ 등의 작품을 통해 연기파 배우로 각인되면서 묵직한 무게감을 주는 줄리안 무어. 신경질적이거나 숨을 멎게 하는 연기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역할,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은 모범생이 사랑에 어수룩할 때 더욱 사랑스럽다. 바로 그 사랑스러움이 원칙론자인 오드리가 얼토당토않게 연애 전에 결혼부터 하는 일탈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배우 개인에게도 중간중간 반듯한 각을 흐트러뜨리는 연기는 필요하다. 그래야 그다음의 진지한 연기가 배로 훌륭해 보이고, 보는 우리도 숨 고르기가 된다.
왓챠의 많은 관람평이 줄리안 무어에 쏠려 있고, 심지어는 ‘줄리언 무어가 든 핸드백’ 정도의 역할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해 놓은 피어스 브로스넌의 연기 얘기를 해볼까. 개인적으로, 힘줘서 하는 연기, 그래서 전율을 부르는 연기와 마찬가지로 힘 뺀 연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브로스넌은 이 영화에서 누가 가장 빛나야 하는가를 명확히 알고, 자신 또는 다니엘을 내세우기보다 무어, 오드리를 받치는 역할을 기꺼이 했다. 힘을 빼고 해도 멋있고, 영화의 균형을 망치긴커녕 완성도를 높였으니 얼마나 고급스러운 연기인가.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피어스 브로스넌은 이 영화에 총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가 우선인 또 하나의 배경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힘겨운 한 해를 보낸 2020년의 세밑이라 더 특별한, 영화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의 미덕이 하나 더 있다. 오드리와 다니엘이 각각 변호하는 이혼 예비커플 록스타 쏜(마이클 쉰 분)과 패션디자이너 세레나(파커 포시 분)가 서로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며 싸우는 성 ‘카슬론 클리헤’이 있는 곳, 아일랜드다.
영화 속에서나마 자연 그 자체인 아일랜드의 풍광을 만나고, ‘바위 성’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성을 구경하고, 사람의 마음을 흥분과 설렘으로 채우는 전통축제에 참여해 보는 일, 사양하기엔 너무 매혹적이다. 현실에선 언제 가볼 수 있을지 요원함이 클수록 거부할 수 없는 영화의 세 번째 주연이다. 아일랜드에 전해져 내려오는 200년 전의 전설, 아일랜드판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화를 통해 확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