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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㊲] 정치와 악마, 권력과 영혼, 세상과 인생…의 관계 ‘대외비’


입력 2023.02.24 07:32 수정 2023.02.24 07:42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피카레스크'의 왕도…데블스 애드버킷 VS 대외비

영화 '대외비' 포스터 ⓒ이하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1997년, 세기말 감성 속에서 봤던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감독 테일러 핵포드, 수입·배급 오스카픽춰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제목부터 ‘악마의 변호사’로 눈길을 끌었고, 상영 시간이 흘러도 가닥이 잡히지 않는 이야기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며 혼자 확신했다.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연기하다 보니 판단을 계속 유보했던 변호사 케빈 로막스는 더 이상 ‘선’이 아니다. 그는 마지 못해 악마(거대 투자기업 밀튼사의 회장 존 밀튼)를 위해 변호하는 악마의 변호사가 아니라, 재판 승리라는 성공을 고귀한 영혼과 맞바꾸는 ‘악마와의 거래’를 스스로 택한 인물이다.


배우 알 파치노가 연기한 존 밀튼 역시, 케빈에 앞서 부와 영혼을 맞바꿔 거래한 악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는 유효기간이 없고, 제아무리 세상 모든 부를 쥐었어도 존은 ‘악마의 마리오네트’가 되어 또 다른 거래자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게 새로이 제물이 된 자가 케빈이다.


알 파치노와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기도 했고, ‘나는 악마와의 거래에 끌어들여지지 않을 만큼 강인한가’에 대한 자문이 현실감을 증폭시키며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듯한 낭패감에 소름 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체를 숨긴 채 정치와 선거의 판을 짜는 권순태(이성민 분, 오른쪽)와 아직은 순수한 정치신인 전해웅(조진웅 분)ⓒ

26년이 지나 그 짜릿한 충격을 영화 ‘대외비’(감독 이원태, 제작 트윈필름·비에이엔터테인먼트, 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에서 맛봤다.


이성민이 연기한 권순태에게서 존 밀튼, 조진웅이 연기한 전해웅에게서 케빈 로막스가 보였다. 이야기의 판이 국회의원 선거와 정치로 옮아온 가운데, 권순태는 엄청난 재력과 지략을 무기로 보수정당을 위해 선거의 판을 짜는 사람이고 전해웅은 무소속의 국회의원 후보다.


원래는 한 편이었다. 하지만 전해웅은 권력의 놀음판인 정치에 집중하라는 순태의 조언에도 국민을 섬기려는 순수한 정치인이고, 권순태는 그런 해웅을 내치는 전략가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어 선거를 치르고, 온갖 부정투표와 술수가 난무한다.


선거에서 이기고도 투표에서 진 정치신인 해웅은 변호사 케빈처럼 악화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과거의 해웅이라면 할 수 없었던 악행을 선택한다. 정치적 보복을 위해, 마침내 금배지를 위해 ‘악마와의 거래’에 도장을 찍은 듯 이제 더 이상 국민은 안중에 없고 순수했던 영혼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스스로 택했는데, 어쩐지 이미 악마와 거래한 순태가 짜놓은 판 위에서 움직이는 ‘체스 기물’이 된 듯 순태가 바라던 모습 대로의 정치인으로 ‘발전’한다.


건달에서 사업가로의 상승을 꿈꾸는 김필도(김무열 분, 오른쪽), 그에게 '악마의 입김'을 불어넣는 권순태(이성민 분) ⓒ

여기까지였다면 ‘대외비’의 매력이 반감됐을 것이다. 예상한 대로의 전개에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배우 김무열이 연기한 김필도가 가세해 전해웅, 권순태와 ‘미친 삼각형’(영화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의 제목을 흉내 내자면 트라이앵글 오브 매드니스^^)을 이룬다. 필도는 순태와 해웅의 사이에 서서 강력한 변수를 만들기도 하고 허수가 되기도 한다.


둘이서 공을 주고받는 탁구는 오가는 순번을 예측할 수 있다. 한 명이 추가됐을 뿐이지만 3명이 치는 탁구는 이번에 공이 어디로 갈지, 공을 받은 선수가 다음엔 어디로 보낼지 예측하기 어렵다. 공을 10번 주고받는다고만 해도 경우의 수가 ‘미치게’ 증가한다.


‘미친’이라고 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성민-조진웅-김무열, 혼자일 때도 연기 잘하는 배우였지만 이리저리 둘씩 뭉치고 셋이 뭉치니 시너지효과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반응이 되어 ‘지지직’ 전기를 일으키고 연기적 커뮤니케이션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연기라는 게 액션과 리액션의 연속인데(액션과 그 액션에 대한 리액션, 리액션이 다시 액션이 되고 그 액션에 대해 리액션을 하는), 이것을 삼각편대를 이뤄 ‘선수’들끼리 주고받으니 흥미진진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악인 대 악인 '맞짱' ⓒ

일테면 영화에서 이 대사들을 만났을 때, 인물들 사이에 놓인 ‘공기’마저 긴장한 듯 숨이 막혔다. 해웅이 제법 큰 변수로 순태를 꼼짝 못 하게 하자 순태가 ‘이에는 이’로 대응, 장군에 멍군으로 응수한 상황이다.


해웅: ……

순태: 이런 판을 나가리라 하제?

해웅: … 이런 판을 다른 말로 윈윈이라 안 합니까?

순태: 해웅이 마이 컸네. 오늘 내가 니 쥑일라 했는데, 인자 마 살려주도 되겠다. 니 잘 기억해라. 정치는 악마하고 거래하는 기다. 권력을 쥘라믄 영혼을 팔아야 해.


배우 이성민의 입을 통해 발화된 ‘악마하고 거래’ ‘영혼을 판다’는 대사 때문에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이 소환됐는지도 모르겠다. 권순태와 존 밀튼은 돈, 전해웅과 케빈 로막스는 명예의 단맛에 빠져 영혼을 판 사람이거니 했는데 영화 ‘대외비’가 본질을 명확히 한다. 그것이 금력이든 정치력이든 ‘권력’을 얻으려면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거래가 필요하다. 과유불급, 돈이든 권세든 많이 가진 자들에게 순수함보다는 뻔뻔함이 보이고 심장과 영혼이 비어 보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럽다 ⓒ

말하노라니 참 씁쓸한 세상과 사람의 풍경이다. 이 대목을 영화 ‘대외비’가 놓칠 리 없다. 이번엔 해웅과 필도의 대화를 통해 ‘눈물 맛’ 같은, 눅눅하고도 찝찔한 감성을 전한다.


필도: 행님… 세상 참 더럽네요, 흐흐.

해웅: 그래, 원래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럽다. 잘 가라.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럽다’. 사실 필도와 해웅의 이 대화는 영화 초반 해웅과 순태가 주고 받은 말과 비슷하다. 자신을 순태가 쓰는 장기판의 ‘졸’로 보자 해웅이 “하, 참 서럽네요”라고 말하자, 순태가 “몰랐나? 원래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럽다”라고 답한다. 순태에게 받은 말을, 자신이 졸처럼 부린 필도에게 돌려준 것이다. 세 명의 배우, 삼각형 위에서 더러운 세상이 돌고 돌며 인생이 얼마나 서러운지 일깨운다.


영화 '대외비', 더 강력해진 '악인전' ⓒ

영화 ‘대외비’는 영화 ‘악인전’의 이원태 감독이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악인전’에도 선과 악의 기계적 구분은 없었는데, 이번엔 주인공들이 모두 악인이거나 악인이 되어가는 인물이다. 그들의 악행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태도 없이 현 사회나 인간 도덕을 풍자하는 성취를 이뤄내는가 하면 인물들을 개성적으로 살려내는 모양새가 스페인에서 15~16세기 유행했던 피카레스크 장르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최근엔 피카레스크 구성이라고 해서, 동일한 인물들이 동일한 배경에서 다른 이야기들을 펼쳐내는 연작 시리즈물에 피카레스크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악인들 혹은 악화하는 서사로 쫄깃한 긴장미를 완성한 영화 ‘대외비’를 통해 오랜만에 피카레스크의 정석을 맛보는 건 어떨까. 영화 속에서 배우 조진웅이 흘리는 비지땀, 놓치면 아까운 명장면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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