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 ‘최악의 악’ 이어 ‘힘쎈여자 강남순’ 등
마약 소재 삼는 드라마들
해외 드라마, 영화 또는 누아르 장르에서 주로 다루던 ‘마약’이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10대들이 주인공이 되는가 하면, 강남 일대에서 벌어지는 신종마약범죄의 실체를 파헤치는 코미디 드라마까지. 마약범죄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된 요즘, 자연스럽게 작품의 소재로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을 통해 남미에서 마약 조직을 운영하는 한국인 마약왕의 이야기를 다뤘던 넷플릭스가 최근 영화 ‘발레리나’를 통해 마약과 성착취 문제를 액션 장르로 풀어냈다.
경호원 출신 옥주(전종서 분)가 친구 민희(박유림 분)를 죽음으로 몰아간 최프로(김지훈 분)를 쫓는 과정을 그려낸 이 영화에서는 최근 한국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와 마약 문제가 녹아있었다. 클럽을 방문한 여성들에게 마약을 강제로 투약하는 등 섬뜩한 장면들이 이어져 긴장감을 조성했었다.
부모에게 마약 운반 수단으로 이용당하던 18살 소녀 다정이 쫓기듯 내려간 시골에서 친구들과 대마밭을 발견하며 펼쳐지는 10대 누아르 드라마 ‘소년비행’에 이어, 마약을 연상케 하는 의문의 수제 쿠키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하이쿠키’가 엘리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욕망을 실현해 주는 쿠키가 소재지만, 쿠키를 먹은 뒤 중독, 환각 증세를 보이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10대 청소년들의 마약 투약 문제를 연상케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0년대, 한-중-일 마약 거래의 중심 강남 연합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찰 준모(지창욱 분)가 조직에 잠입 수사하는 과정을 그린 디즈니플러스 ‘최악의 악’부터 선천적으로 어마무시한 괴력을 타고난 3대 모녀가 강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신종마약범죄의 실체를 파헤치는 내용의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까지. 마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올 8월 말까지 단속된 마약류 사범(대마·마약·향정)은 1만 8187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8.7% 증가했다. 이런 추세라면 연말엔 2만 7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여기에 가수 남태현, 배우 유아인, 이선균 등 연예인들이 연이어 마약 투약 혐의를 받으면서 이제는 마약이 우리의 현실과도 멀지 않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이에 과거에는 국내 영화, 드라마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소재로 꼽히던 마약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은 물론, 10대 드라마 또는 코미디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도 활용이 되고 있다.
제작진, 출연진도 이것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위하준은 ‘최악의 악’ 종영 인터뷰에서 다수의 매체를 통해 “갈수록 불쌍한 부분이 있다. ‘상처를 극복하고자 한 게 왜 이거였을까’ 안타까웠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악행을 묵인하고 지시한다는 것 자체가 누구보다도 악인이다. 정당화되는 건 잘못된 것이다. 마약에 대한 경각심도 필요하다. 처벌이 너무 약하다”라고 언급했었다.
또한 ‘힘쎈여자 강남순’은 경찰청과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등이 주관하는 ‘노 엑시트(NO EXIT)’ 마약 범죄 예방 캠페인의 일환으로 마약 검사 포스터를 배포하기도 했다. 세 모녀 히어로 강남순(이유미 분), 황금주(김정은 분), 길중간(김해숙 분)의 괴력을 유쾌하게 담아 캠페인의 효과를 높이며 미디어의 순기능을 보여줬다.
다만 영화, 드라마가 마약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오히려 경각심을 낮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청소년 마약 근절 및 예방 대책 토론회’에서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이 “약물의 위험성을 알리진 않고 재미로만 접근하는 드라마가 늘고, 연예인의 잦은 마약 논란이 청소년들에게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누그러뜨리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한 바 있었던 것. 마약 범죄 증가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이를 장르적 재미를 높이는데 도구로 활용하지 않도록 ‘과정’에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