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한 기술개발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 '생산직 잣대' 들이대는 금속노조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에 대한 근로시간 유연성 부여를 요구하는 반도체업계 요구에 “적극 지원하겠다”고 화답했다. 지난달 28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및 주요 반도체 기업들과 만난 자리에서 업계 최대 현안에 대해 흔쾌히 답을 내놨다.
국민의힘은 관련 내용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을 당론 발의하고 연내 통과를 추진 중이다. 김 장관은 이 법안이 국회에서 원안대로 통과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반도체 업계로서는 김 장관의 이런 발언이 반갑긴 하겠지만, 사실 이 법안이 통과되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정부가 아닌,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의 협조다. 국회 전체 의석 300석 중 170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반대한다면 반도체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없다.
민주당은 반도체특별법의 내용 중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에 대해서는 전향적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모습이다. 핵심 지지층인 노동계에서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 장관의 발언이 알려지자마자 민주노총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은 즉각 반발 성명을 냈다. 김 장관 뿐 아니라 지난달 11일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찾아 경영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까지 싸잡아 규탄했다. 반도체특별법을 ‘과로 조장법’이라고 정의하며 “투쟁으로 막아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금속노조가 내세운 반도체특별법 반대 논리를 살펴보면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의 상황과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진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 건강을 갉아먹고 결과적으로 생산성 저하를 부른다.”
“노동시간을 늘려 산업을 일으킨다는 발상은 구시대적이다.”
“노동시간이 짧을수록 노동생산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주로 생산직 근로 현장에서 제기되던 문제점들이다.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기업들도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사정이 열악한 일부 중소‧영세기업을 제외하고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잘 정착돼 있고, 일부 대기업에서는 노조 측이 오히려 연장근로수당을 더 받아내기 위해 정규 근로시간 외 생산라인 가동을 사측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반도체 연구개발 현장은 상황이 다르다. 반도체는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신속한 기술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미세화, 수율 안정화 등을 위한 기술 확보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R&D 프로젝트가 추진되면 업무를 집중해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 하는데, 일정 시간이 되면 연구 중이던 장비 전원이 자동으로 꺼지고, 다음날 다시 세팅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환경에서 기술개발 속도 경쟁이 가능할 리 없다.
김정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한국 기업에 ‘HBM을 더 빨리 만들어 줄 수 없냐’고 얘기했을 정도로 기술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고 제품 개발에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한국은 후발주자임에도 미국과 일본을 쫓아갈 수 있었던 건 속도였는데, 지금도 속도를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단순히 ‘노동시간을 늘려 제품을 많이 뽑아내는’ 개념이 아니라 일정 기간 연구개발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속도전에서 밀리지 않도록 해달라는 게 반도체 업계의 요구인 것이다.
세계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엔비디아 직원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는 대신 종종 주 7일 근무에 새벽 1~2시까지 일한다는 사실이 블룸버그 등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세계 1위 업체인 대만 TSMC의 연구 센터도 하루 24시간, 주 7일 가동된다.
연구개발 인력을 1년 365일 장시간 근무에 갈아 넣는 게 아니라 중요한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집중적으로 투입해 개발 과정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적절한 휴식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반도체특별법 반발 성명을 낸 금속노조 산하 사업장 노조는 대부분 자동차, 조선 등 생산직 인력 위주로 구성돼 있다. 금속노조 간부들도 그런 대기업 생산직 노조 출신이 대다수다. 그런 그들이 생산직 근로자들에게나 적용할 잣대를 가지고 기술집약적 산업인 반도체, 그것도 연구개발 인력의 근무형태에 선을 긋는 게 상식적인 일인지 의문이다.
노동계 입장에서는 이유 막론하고 ‘주 52시간 근무제’에 손을 대는 것 자체에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정부‧여당과 함께 국가 경제와 산업의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공당이다. 생산직 근로자와 최첨단 분야 연구개발 인력의 근무 형태를 일괄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비상식적 주장에는 귀를 닫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