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우려국 가리지 않고 관세 투하…반도체도 영향권
반도체 보조금 재협상·연기 가능성 제기…대미 투자 압박 카드
삼성·SK 투자·생산전략 고심…일각선 "반도체 위상 고려할 때 투자 가능성↓"
미국 트럼프 정부가 각종 명목의 관세로 글로벌 시장을 압박하는 동시에 반도체 보조금 재협상 카드도 꺼내들면서 국내 반도체가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관세 폭탄' '보조금 재협상'은 모두 반도체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다. 관세 여파는 줄이고 보조금은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생산·사업 전략이 시급한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심은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14일 반도체업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명목의 관세를 투하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취임 이후 무역 불균형 해소를 이유로 주요국을 대상으로 전방위적인 관세 인상을 관철시키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그의 '관세 살포'는 우호국·우려국 등 대상 국가와, 반도체, 철강 등 대상 품목을 가리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중국에 10% 관세 부과를 발표했으며, 한 달 유예를 하기는 했지만 우방국으로 분류되는 캐나다·멕시코에도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품목별로 부과하는 보편 관세에도 손을 뻗쳤다. 철강·알루미늄에 25%의 세율을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자동차, 반도체, 의약품도 검토중이라며 속도전을 예고했다. 그는 반도체만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품목, 세율, 대상국, 시기 등은 특정하지 않아 기업들은 대처 방안을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따른 보조금 불만을 이유로 트럼프 정부가 재협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져 업계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로이터는 14일(현지시간) 백악관이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 재협상을 추진중이며 지출 일부를 연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기존의 보조금 책정과 관련된 요구 사항을 평가하고 변경한 후 일부 거래를 재협상할 예정이다.
관세 폭탄을 예고한 상황에서 주기로 했던 보조금을 축소·철회할 것이라는 전망은 국내 반도체업계에 악재다.
앞서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총 370억 달러(약 53조원)을 투자하는 대가로 미 상무부로부터 보조금 47억4500만 달러(약 7조원)을 수령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도 미 인디애나주에 AI(인공지능)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짓기로 해 4억5800만 달러(약 6600억원)을 받기로 약속했다.
로이터 보도대로라면 향후 미 정부의 판단에 따라 삼성·SK는 보조금을 전액 또는 일부만 받거나, 아예 수령하지 못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삼성·SK 반도체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같은 트럼프 정부의 행보는 아이러니하다. 이들이 생산하는 첨단 메모리 주 수요처가 빅테크인 점 등을 감안하면 관세 부과, 보조금 축소·폐지로 인한 실익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D램 점유율은 삼성 41.1%, SK하이닉스 34.4%로 합산 점유율은 75%를 넘어선다. 점유율 견조 이유로 트렌드포스는 "데이터센터의 DDR5 및 HBM 수요 증가"라고 밝혔다.
데이터센터 증설은 아마존, MS(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등 빅테크들이 가장 속도를 내고 있다. 데이터센터에는 최신 GPU(그래픽처리장치)가 필요하며 여기엔 HBM 등이 탑재돼 삼성·SK를 빼놓고는 미래 투자를 말할 수 없다.
만일 미국이 반도체 관세를 부과한다면 조달 단가가 상승하고 제조사들은 자연스레 제품 가격을 올리게 된다. 이 부담은 미 현지 기업들이 고스란히 지게 된다. 미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이 있지만 삼성·SK 물량을 소화할 정도는 아니다.
반도체 보조금도 마찬가지다. 약속한 보조금을 줄이거나 없던 일로 하면 한국 기업들은 늘어나는 투자 비용만큼 판매 가격에 전가할 가능성이 있다. 연쇄적인 가격 상승은 주 수요처인 IT 기업들의 원가 부담으로 이어지며, 이는 미국이 구상하는 AI 생태계 경쟁력과 직결된다.
여러 우려 속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에 보조금까지 이중 압박을 가하는 것은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를 블랙홀처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트럼프 정부의 궁극적 의도는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라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교육원장도 "미국에 공장을 더 지으라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언급했다.
미국이 자국 내에서 만들기 원하는 반도체는 첨단 제품이다. 일례로 TSMC는 400억 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에 피닉스 1·2공장을 짓고 있다. 이곳에서는 각각 4nm·3nm(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제품이 양산된다.
미 정부는 TSMC, 삼성, SK 등의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 여부에 따라 관세율을 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일 관세 카드가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반도체 보조금을 축소 또는 폐지하겠다며 기업 압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김용석 원장은 "반도체 기업들의 행보를 보면서 효과가 크지 않다고 판단할 시 바이든 정부에서 정한 보조금을 재협상하자고 주장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이 즉각 대미 투자 확대를 결정하기는 힘들다. 삼성은 파운드리 시황 악화로 작년 투자 규모를 축소했다. 경쟁사 대비 수율(양품 비율)이 저조하고 '큰 손' 유치에 난항을 겪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환율·원자재 가격 상승, 반도체 인력난 등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달리 TSMC의 경우 애플,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가 빅테크여서 미 본토에 투자를 늘린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주가 가능하다. 김용석 원장은 "국내 기업은 미 공장 투자 강화로 화답해야겠지만 수율이 안나오는 상황에서 공장을 무작정 짓기만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중 압박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되는 국내 기업들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생산·사업 전략을 고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반대로, 한국 메모리 반도체 위상을 고려하면 삼성·SK가 대미 투자를 늘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관세효과가 나타나려면 미국 안에서 대체상품이 생산돼야 하는데, HBM 등 메모리반도체는 그럴 수 없다보니 (관세)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관세 부과로 대미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IBK기업은행은 '미 보편관세가 국내수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반도체 등은 미국 관세율 인상에도 불구하고 대미 수출 확대를 기대할 수 있는 산업군"이라며 작년 대미 수출액 비중(7.47%)을 고려할 때 관세 1%p 인상 시 대미 수출액은 작년 대비 0.04%, 10%p 올리면 0.44% 각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정부는 다음주 수출전략회의를 열고 관세 피해 우려기업에 대한 지원과 수출 품목·지역 다변화를 논의한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는 우리 산업과 수출 영향을 분야별로 철저히 점검하고, 선제적이고 빈틈없이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