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조 "기사들 과로사로 죽어가는데 노동강도만 높아져…사비 들여 차고 낮은 차량 교체도 불가능"
입주자들 "아이들이 단지 내에서 트럭 피하며 노는 일 없어야…어떤 가치도 안전보다 우선할 순 없어"
모든 차량이 지하로 진입하도록 설계된 '지상공원형' 아파트 단지의 택배 차량 진입 문제를 둘러싸고 주민과 택배기사들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주민들은 어린이 교통사고, 보도 훼손 우려 등을 이유로 택배 차량의 지상 진입을 금지했지만, 기사들은 가뜩이나 배송할 물건이 많은 상황에서 노동 강도만 높아졌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최근 서울 강동구의 A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 내 지상 도로에서 차량 통행을 금지하기로 하고 지난 1일부터 전면 통제를 시작했다.
그러자 택배 기사들은 항의 차원에서 아파트 후문에 택배 상자를 한가득 내려놓고 사라지는 이른바 '택배 대란'이 일어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5일 기자가 직접 찾은 A아파트 단지의 모든 진입로에는 '오토바이 지상 통행 절대 금지'라는 경고판이 달린 바리게이트가 설치돼 있었다. 약 5000세대가 거주하는 이 아파트는 관리사무소 허가 없이 차량이 지상 도로를 통해 단지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곳곳에서는 손수레에 물건을 한가득 싣고 숨가쁘게 달리는 택배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수레가 덜컹거리면서 물건이 굴러떨어지자 기사는 황급히 다시 물건을 쌓아 올리기도 했다.
이날 단지에 물건을 배송한 한 택배업체 기사는 "친한 선배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급하게 일을 도우러 나왔다"며 "차가 단지로 들어올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수레로 나르고 있는데, 저녁까지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또 다른 택배 기사는 "단지 가장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웠지만, 배송지 바로 앞에 주차하는 것과 (노동 강도가) 차원이 다르다"며 "물건들을 한 번에 수레에 싣기 어려워 차까지 몇 번 왔다 갔다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소연했다. 실제 A아파트 단지 후문에서 중앙동까지 거리는 약 500m로 일반 성인 걸음으로도 8분 가량이 소요됐다.
이 아파트 측은 긴급 차량과 이사 차량 등 지상 통행이 불가피한 차량들을 제외하곤 모든 차량을 지하주차장을 통해 이동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택배 차량의 차체는 A아파트 지하주차장 진입 제한 높이인 2.3m보다 높아 지하로도 출입할 수 없는 형편이다. 택배 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차량의 높이는 2.5m이고, 냉장기능을 갖춘 탑차는 2.7m에 달한다.
앞서 2018년 '지상공원형' 아파트의 택배 차량 진입 문제를 놓고 신도시 곳곳에서 갈등이 잇따르자 국토교통부는 2019년부터 지하주차장 높이를 2.7m 이상으로 짓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법 시행 전 사업계획을 승인받은 아파트들은 주차장 높이는 2.3m여서 갈등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단지 주민과 택배 기사 양측이 만족할만한 해법을 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파트 측은 택배 기사가 작은 차를 이용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택배 기사들은 차량 교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작은 차를 이용하면 노동시간이 불필요하게 늘어난다고 반박했다.
강민욱 전국택배노조 교육선전국장은 "작은 차량을 이용하면 한 번에 배달할 수 있는 물량이 3분의 1로 대폭 줄어 물류센터에 한 번만 다녀오면 될 일을 두 세 번 더 다녀와야 한다"고 토로했다. 강 국장은 이어 "가뜩이나 코로나19로 배송할 물량이 폭증해 택배 기사들이 과로사하는 마당에 아파트의 조치는 이런 현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택배 기사들은 직접 차량을 구입한 뒤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 개인사업자"라며 "수천만원의 비용을 내고 차고가 낮은 차량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주민들은 단지 내 안전사고 방지 차원에서 차량 진입을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A아파트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택배사태 관련 개인생각'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은 "한번 지상 배송을 허용하면 지하로 배송하던 다른 택배 업체들도 형평성 문제를 들어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배송할 것"이라며 "단지는 차도로 변하고,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는 탓에 우리는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이 단지 내에서 트럭을 피하며 자전거를 타고 뛰어다니는 일이 없게끔 해야 한다"며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결국 (택배 차량의) 지하화에 성공한 인근 단지의 사례를 참고해 위원회에서 현명하게 추진해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해당 게시물에 달린 댓글들은 "지상에 차량이 다니는 건 상생이 아니라 주민의 희생" "자식들이 결혼하고 손주가 생기면 귀한 손주들이 위험해지는 것" "어떤 가치도 아파트 안전을 우선할 수 없다"며 일제히 공감을 표시했다.
일부 주민들은 현 사태가 부담스럽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이날 단지에서 만난 한 주민(50대·여)은 "사태가 널리 알려져 단지에 대해 나쁜 인식이 굳어질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주민(40대·여)은 "결국 택배 배송에 차질이 생기면서 주민들도 불편을 겪고 있다. 빨리 사태가 끝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다른 주민(40대·여)은 "진입 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서로가 조금씩 양보해 아이들도 안전하고 택배 기사분들도 고생하지 않는 해법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