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깊이 있는 대화가 드물어진 지 오래. 일대일 인터뷰가 아니니 인터뷰어(질문하는 사람)의 개성과 색깔대로 질문이 운용되기 어렵고, 인터뷰이(답변하는 사람) 역시 각양각색의 질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명확한 설명을 해내는 것만도 버거운 게 현실이다.
기능적 역할이 커진 인터뷰지만, 가끔 놀란다. 여러 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하는 질문이 물 흐르듯 하나의 결을 띠기도 하고, 배우나 감독과 감성을 나누는 순간이 오기도 하고, 나라면 꺼내지 못할 이야기가 화두에 올라 때로 흥미진진한 때로 귀한 답변을 얻어듣기도 한다.
가장 아쉬운 건, 예전 일대일 때는 영화와 인생에 관한 내공 어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던 배우조차 다대일 상황에서는 재미와 명쾌함이 우선된다는 사실이다. 질문과 답변이 여러 차례 꼬리 물려야 진실이나 의미가 돋아나는 얘기를 나누기란 녹록지 않다.
그래도 불가능은 없는 것인지 오래전엔 한석규와 김윤석, 수년 전엔 조우진, 지난해엔 오정세 배우가 라운드 인터뷰의 악조건 속에서 일순간 책을 읊조리듯 연기와 인생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꿋꿋이 펼쳐냈던 장면이 기억에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그 순간이 왔다. 영화 ‘아마존 활명수’ 인터뷰에서 만난 배우 진선규다.
이제 준비하는 질문의 개수는 반 이상으로 줄었다. 십여 개의 질문 가운데 배우에게 건네지는 것은 서너 개 정도. 어느 시점쯤에 하는 게 흐름에 맞는 타이밍인지 생각하며 기회를 본다. 진선규 배우에게는 3개를 할 수 있었는데, 그중 두 개의 답변을 공유하고 싶다.
첫 번째 질문은.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의 김자령 장군은 임금도 버린 나라를 목숨으로 지킨 의병대장 김덕령에 곽재우 장군을 섞은 인물로 보였고 너무나 점잖은 우국충정의 양반으로 표현했다. 영화 ‘아마존 활명수’에서는 남미의 통역사 빵식이가 되어 공기처럼 가볍고 한없이 촐싹댄다. 연기 스펙트럼이 크다. 공통점은 연기를 잘한다는 것. 제가 궁금한 것은 배우 진선규의 광폭 연기 스펙트럼은 어디에서 왔나, 어떻게 얻어졌다고 생각하나.
“김자령만의 진중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좋은 것을 향해 가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주신 환경에서 가져온, 그것을 꺼내 쓴 것 같고요. 이렇게 살다 보니까 참으로 가고 싶은 곳은 ‘빵식이’, 인간 진선규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에요. 밝고, 리드하고, 휘어잡고 싶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이 배역으로 소화해 보고 싶은 희망들, 그게 배우를 하기 시작했던 이유인 것 같아요.”
“배우를 시작했던 찰나가 체대에 가려고 준비하던 (고3) 때인데. 친구 따라 진해의 작은 극단에 놀러 갔다가, 너무 신기하게 따뜻한 느낌이 있어서 계속 놀러 갔어요. 그러다 어느 분께 ‘이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주시더라고요. 아버지가 소리 지르는 장면이 있는데, 데시벨이 큰 사람이 아닌데, 질러 본 적이 없는 소리를 내가 질렀는데 생소하면서 짜릿했어요. 다름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르고 생소한데 왜 재미있었을까. 독백을 외워서, 두 달 만에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요.”
“지금도 동경합니다, 저와 다른 것을요, 무대 위나 스크린, 드라마에서. 그래서 그러나 봐요, 그 폭이 생긴 이유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요만큼이면 그걸 쓰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걸 쓰고 싶은 마음. (제 연기 폭이) 넓어 보이신다면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질문.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 진선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사실 이걸 찾아내는 게 기자들의 일인데. 개인적으로 최고의 인간미, 내면의 선함이 필요한 캐릭터에 적격이다 싶다.
“(침묵) 생각을 많이 하고 얘기해야 하는 것 같은데. 얼마 전에 결혼식 축사를 쓰면서 좀 생각했던 말이었는데…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그게 답이 될는지. 좋은 사람, 좋은 배우,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사람이기보다는 (상대를) 그렇게 먼저 봐주는 사람이 되자. 제가 먼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에 대입해 생각해 보면) 상대 배우가 잘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를 ‘배역’으로 보면, 상대도 저를 배역으로 봐줘서, 서로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저를 ‘너 얼마나 잘하는 애니?’로 보는 게 아니라 배역으로 봐주면 편하더라고요.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있고요.”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좋은 사람으로 봐주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살고 있으면, (상대도) 좋은 사람이 돼 있지 않을까? 제가 상대 배우부터 그렇게 봐주면, 저도 좋은 배우 좋은 사람이 돼가지 않나! 제가 살아가는 방식, 목표점이고요. 저는 그 과정에 있다, 그렇게 살고있는 게 제 정체성인가 합니다.”
다수가 함께하는 인터뷰라 크게 감탄할 수 없었지만, 내면에서 존경심이 일었다. 이 세상 함께 살아가는 상대를, 한 작품 함께하는 상대 배우를 재지도 말고 평가하지도 말고 먼저 좋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그저 하나의 목표를 이뤄나갈 동료로 보고 인생과 작품에 임하면! 나부터 그렇게 실천하면! 나도 상대도 그러한 과정에서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돼 가리라는 믿음.
어려운 단어 하나 쓰이지 않은 말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배우와 배우의 연기에 대해 깊이 들여다본 혜안이 느껴지는 명언이다. 말보다 실천이 어려운 다짐이고, 진실로 좋은 결과로 다가오리라는 믿음이 없으면 중도 포기하기 쉬운 ‘지난한 길’이다. 과정에 있되 열매를 맛보았고, 진정 그렇게 실천하고 있기에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있음이 더욱 놀라웠다. 작은 것 하나도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지 않은가.
진선규 스스로 밝힌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들으니 첫 번째 질문의 답이 더욱 풍성하게 다가왔다. ‘전, 란’의 김자령 장군에게서 인간의 도를 아는 참된 선비가 보이고, ‘아마존 활명수’의 빵식이에게서 남미의 한인 2세 인싸(인사이더, 다양한 사람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사교성 뛰어난 인물)와 동시에 자신이 지닌 온갖 언어능력을 동원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진봉(류승룡 분)과 타가우리족 사람들을 돕는 따뜻한 인간미가 보이는 이유. 그 바탕에는 배우 진선규가 품은 생의 철학, 그것에서 배태된 연기철학이 탄탄히 지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끝으로 후배의 좋은 질문 덕에 듣게 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사람 진선규의 삶에 사람이, 배우 진선규의 삶에 동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읽히는 대목이다.
“친구나 후배들에게 종종 얘기해요. ‘나도 이렇게 됐는데 너도, 너는! 더 잘될 거야’. 힘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짜 그럴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지금 이만큼 잘) 돼서,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근데, 믿고,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는 것 쉽지는 않아요. (함박웃음) 그 말이 씨앗이 되어 이제 조금씩 보여지기 시작해서 기뻐요, 그런 친구가 있거든요. ‘전, 란’의 통역사 배우. ‘전, 란’은 저한테도 제 필모그래피에 있어 감사한 작품이에요, 좋게 사랑받고 있고. 저뿐만 아니라 통역사 소이치로 역의 배우, 너무 좋아하는 후배거든요. 12년 전 영화 ‘개들의 전쟁’, 같이 오디션 본 친구인데요. 통역사 준비를, (대사가) 아주 조금이었는데 너무 준비를 잘해서 (김상만) 감독님께서 그렇게 크게 쓰신 거예요. 다 함께 영상 보는데 소이치로 나올 때마다 (반응이) 터져서 너무 행복했어요. 저도 그 작품 해서 좋았지만, 너무 좋아하는 배우 동생이 12년 만에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개인 인터뷰를 하는 일은 또 다른 감동입니다.”
본인의 무명 역사를 떨친 것처럼, 바로 지금 맞은 경사처럼, 배우 고한민 얘기하다가 감격에 우는 줄 알았다. 영화 기자에게 이런 장면은 참 멋지게 다가온다. 역시 영화는 협업이고, 그 함께하는 힘이 빚어내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 영화, 그것은 배우만이 아니라 우리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함께’ 바르게 살고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진선규, 영화 ‘극한직업’의 마 형사를 넘어서는 코믹연기가 영화 ‘아마존 활명수’(감독 김창주, 제작 로드픽쳐스·CJ ENM MOVIE, 배급 바른손이앤에이)에서 펼쳐지고 있다. 역대 현지 통역사 연기 중 가장 언어 감각이 좋고, 제일 큰 웃음 주는 ‘빵식이’의 활약, 놓치기엔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