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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나” 여전히 뜨거운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인터뷰]


입력 2025.01.12 07:00 수정 2025.01.12 07:11        김윤일 기자 (eunice@dailian.co.kr)

현역 은퇴 후 유튜버로 활발한 활동 '제2 전성기'

"보고 있나" 유행어, 아마추어와 1:2 매치업 화제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은 한국 격투기 1세대 파이터 중 하나다.


고교 3학년이던 2004년 데뷔해 큰 주목을 받았고 보다 큰 무대로 진출할 유망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심각한 목 부상으로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은퇴를 해야 했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며 다시 케이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미국 유학길에 오른 박원식이다. 격투기 본고장에서 제대로 된 수련을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결국 데뷔 16년 차였던 2020년 1월, Heat 46 무대에서 그토록 바라던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르는데 성공했다.


현재 유튜버로 활발히 활동 중인 박원식은 자신의 인생 절반 이상을 쏟아 부은 MMA계에 여전히 몸담고 있다. 특히 지난달 말에는 블랙컴뱃 무대에서 복서 김남신과 맞붙어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친 1월 둘째 주 어느 날, 서울 강남에서 박원식을 만났다. 얼굴을 보자마자 용기를 내어 그의 유행어인 “보고 있나!”를 외쳤다. 다행히 박원식이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가슴 철렁했던 순간을 뒤로하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 인터뷰가 진행됐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Q : 지난해 말 김남신과의 복싱룰에서 승리를 거뒀다. 축하드린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박원식 : 고맙다. 맞대결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유튜브도 찍고 있으며 다음 어떤 매치업을 잡을지 조율 중이다.



Q : 1986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따지면 올해 마흔이 되었고, 아직 생일 지나지 않았으니 공식적으로는 38세다. MMA 데뷔년도를 보니 21년 전인 2004년이다. 꽤 이른 나이에 데뷔를 했고, 아마추어 단계에서의 준비 기간까지 감안하면 격투기를 무척 빨리 시작했는데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박원식 :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건데 어릴 때에는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가 최대 고민거리였다.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한 것도 격투기를 배우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키가 매우 작았다. 생일도 12월이다 보니 또래에 비해 성장도 늦었고, 이렇다 보니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Q : 지금의 피지컬을 보면 믿을 수가 없다.


박원식 : 정말이다. 친구들이 늘 나를 때렸고 내 물건 빼앗아가고. 그런데도 이겨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엄마를 졸라 태권도장을 다녔다. 검은 띠만 따면 괴롭힘을 안 당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다녔고 마침내 4학년이 되어 검은 띠가 됐다. 이때 애들과 맞설 수 있게 됐고 더욱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중학교에 가서는 공수도, 합기도, 주짓수 등을 찾아다니며 싸움을 보다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때 운동신경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신체적으로 남들보다 더 발달하기 시작했고, 체력검사에서도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잠시 축구 선수도 했었는데 곧잘 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본격적으로 격투기를 배웠는데 다행스럽게도 운동부가 아니었음에도 운동부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배려해주신 선생님 덕분이며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Q : 그리고 프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박원식 : 고교 1~2학년 때 계속해서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를 하며 경험을 쌓았고, 고교 3학년에 와서 정식으로 프로 데뷔를 하게 됐다. 그때가 2004년이다. 당시 국내에는 K-1 열풍이 몰아칠 때였고 데뷔할 때쯤 최홍만과 밥샵의 경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보면 격투기 1세대, 그 중에서도 막바지라고 보면 된다. 참 힘들게 운동하던 시기다. 당시 MMA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관심도 가져주지 않고 나 역시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과만 격투기 이야기 나누고, 우리도 프라이드나 K-1에 갈 수 있을까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Q : 프로 초창기 닉네임은 ‘바키’였다. 일본 격투 만화 주인공 한마 바키에서 따왔을 텐데?


박원식 : 일본에서 데뷔했을 때 일본인들이 내 이름 부르는 것을 어려워했다. ‘바쿠온시크’ ‘온시크상’ 이렇게 말이다. 마침 회사에서 ‘일본인들이 네가 바키와 닮았다고 하더라’라고 하길래 닉네임을 아예 ‘바키(PARKY)’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3연승을 달렸다.



Q : 지금까지 두 차례 은퇴 선언을 했다. 프로 초창기인 2010년까지 10승 1무 2패 1NC로 잘 나가다가 2013년 요시다 요시유키전까지 내리 3연패하더니 갑자기 은퇴했다.


박원식 : 3연패 당시 몸이 너무 안 좋았다. 부상을 달고 살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몰랐다. 다친 몸으로도 ‘해야 한다, 쉴 수 없다’ 이런 분위기였다.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체계화가 된 지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의 경우에는 보다 큰 단체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까지 눈앞에 있었다. UFC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더 조급했던 것 같다.



Q : 지금 시계를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박원식 : 쉰다. 무조건 쉰다. 이제는 알고 있다. 만약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그런 몸 상태라면 경기를 취소하고 죄송하다 말한다. 1년 정도 쉬며 몸을 회복시킨 뒤 다시 기회를 만들면 된다.



Q : 어쨌든 좋지 않은 몸 상태로 경기를 거듭했고 결국 부상으로 1차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수술대에 올랐다.


박원식 : 목에 붙은 뼈들이 부러져있었고 디스크도 다 터져있었다. 매우 위험한 수술이라 목 뒤가 아닌 앞쪽을 절개해 수술을 받았다. 당연히 수술 자국이 남았는데 이게 나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보는 이들마다 물어봤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아팠던 시기의 이야기를 해야하고 이게 10번, 100번이 되다보니 대인기피증까지 올 정도였다. 결국 흉터를 가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겼다. 문신에 대한 사람들의 좋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 목의 흉터를 묻는 것 보다 문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훨씬 낫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다행히 박원식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재활을 거친 뒤 다시 파이터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는 2016년 로드FC에서도 활동하다 돌연 미국 유학의 길을 택했다. 대회 출전이 아닌 격투기에 대한 공부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기량을 갈고 닦은 박원식은 지난 2020년 1월, 마침내 ‘Heat 46’ 무대에서 꿈에 그리던 챔피언 벨트(라이트급)를 손에 넣었다.



Q : 커리어에 비해 꽤 늦은 나이에 챔피언이 됐다. 오래 기다린 만큼 기쁨도 컸을 텐데. 그런데 이때 선택이 2차 은퇴였다.


박원식 : 일단 격투가로서의 1차 목표는 이뤘다고 생각했다. 보다 높은 곳으로 가려면 미국 등 해외로 가야하는데 당시 내 상황과 기량으로는 너무 큰 욕심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PFL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였다. 그러나 마침 코로나19가 터지며 하늘길이 닫혔다. 다시 준비해서 가기에는 젊을 때만큼의 용기가 나지 않았고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더 커졌다.



Q : MMA 공식 전적 16승 1무 8패 1NC의 커리어를 갖고 있다. 16승 중 9번이 KO 및 TKO였고, 패했던 8번 역시 절반이 KO패였다. 그만큼 화끈하다고 볼 수 있는데 본인의 격투 스타일을 정의하자면?


박원식 : 뜨겁다. 사실 경기장을 뜨겁게 만드는 건 선수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스타일에 따라 판가름된다. 나 역시도 지루한 스타일의 경기면 보다 잠이 들 때가 있다. 반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팬들 위해, 나를 위해 화끈하게 경기를 펼치는 이들이 있다.


어렸을 적 반더레이 실바, 미르코 크로캅을 보며 ‘나도 저렇게 화끈한 경기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품고 달려왔다. 물론 나도 가끔은 포인트를 따기 위한 경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면 나 자신을 뜨겁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마음을 변하지 않았다. 뜨거운 파이터가 되기 위해 늘 노력했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Q : 박원식 선수의 경기를 보면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눈에 띄는 한결같은 모습 하나가 있다. 바로 스텝이다. 상당히 경쾌하며 몸이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박원식 : 어릴 때부터 복싱 등 투기 종목을 보며 느꼈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스텝이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 무하마드 알리는 물론 잘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쉬지 않고 스텝을 밟았다. 물론 스텝 없이 인파이팅을 구사한 하드펀처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남들보다 더 잘 싸우려면 무엇을 더 잘 쓰고, 더 유용하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을 갖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선수가 있었다. 바로 UFC 챔피언에 올랐던 도미닉 크루즈였다. 저 선수는 이 상황에 왜 저런 스텝을 쓰지? 저런 스텝을 사용하려면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야 하고, 어떤 훈련 방식을 거쳐야 하지? 등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태권도, 축구 등으로 하체가 단련되어 있어 스텝을 잘 사용하는 것 같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Q : 2차 은퇴를 선언을 했고 유튜버가 됐다. ‘코리안 갱스터’ 채널을 개설한 지 이제 막 1년 정도 됐는데 유행어도 만들어냈다. “보고 있나” “웰컴 투 코갱쇼” “다르다고 했지” 등 말이다. 유튜브는 왜 하게 됐나.


박원식 : 재작년 추성훈 형으로부터 유튜브 출연 제의를 받았다. 한국과 일본의 파이터들을 모아 이벤트성으로 한일전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다. 업로드 후 조회수가 500만, 600만 회가 넘어가더라. 심지어 길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너무 신기했다. 이후에도 다른 유튜브 채널에 출연했는데 그때도 화제가 됐다. 나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개설했다.


현재 구독자 수가 4만 2000명 정도 된다. 별 것 아니라 할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대 이상이다. 1년에 1만 명씩, 10만 구독자까지만 가자라는 게 나의 목표다.



Q : 유튜브의 특성상 꾸준히 구독자를 늘리기보다 한 번에 확 늘리는 게 효과적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크게 화제가 된 몇 번의 대전이 있었다.


박원식 : 그렇다. 아마추어 파이터 2명과 맞붙는 타 채널 콘텐츠에 출연했다. ‘과연 2대1로 가능해’라는 물음에서 시작했고, 내가 승리했다. 이때 ‘코리안 갱스터’의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이후에는 헬스하는 분들과 세 차례 맞붙었다. 나보다 몸집도 크고 체중도 훨씬 많이 나가는 이들이었다. 맞붙기 전 ‘박원식도 한 방 맞으면 끝난다’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결국 내가 다 이겼다.


원초적으로 궁금한 것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들. MMA 선수가 복싱 선수와 복싱 룰로 싸우면 어떨까? 그래서 지난해 말 김남신 선수와 붙었다. 앞으로도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재미가 있는 콘텐츠들을 선보이려 한다.



Q : 격투가로서의 박원식, 인간 박원식, 그리고 유튜버 박원식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설명하자면?


박원식 : 일단 공통점은 모두 나라는 점이다. 그 안에서 내가 여러 명으로 나뉜다. 그래서 유튜브를 하는 박원식도, 격투기하는 박원식도, 인간 박원식도 결국 모두 박원식이다. 삶이든 격투기든, 유튜브든 모두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 직업과 사생활을 따로 구분해 보여드리진 않는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Q : 대회 일정이 없는 평소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일상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 달라.


박원식 : 일반 회원들을 상대로 격투기를 보다 쉽게 익힐 수 있는 PT를 하고 있다. 강남에 위치한 바이젝 월드 피트니스다. 이곳에서 케이지를 만들어 공간을 내어주셨는데 수업도 하고 나 또한 운동을 할 수 있게 배려해주셨다.



Q : 파이터로서의 박원식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박원식 : 나 역시도 너무 궁금하다. 사실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대회 준비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훈련을 소화하는데 큰 불편함은 없지만 문제는 회복이다. 이게 한 해 한 해가 다르다. 팬들에게 화끈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 향후 2~3년 정도로 보고 있으며 이때까지 긴장감을 갖고 불꽃을 태울 생각이다. 마지막 불꽃이 아름다운 법이다.



Q : 마지막 질문이다. 나에게 MMA란?


박원식 : 인생의 전부이면서 애증의 관계다. 만약 MMA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또 싫을 때도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은 감정이 더 큰 것 같다. 두 번이나 떠났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왔지 않나. 이제는 사랑하는 사이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코리안 갱스터' 박원식. ⓒ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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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일 기자 (eunic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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