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이 붉게 타오르며 춤을 추는 지난 가을에 사진가회원들과 함께 강원도로 출사를 다녀왔었다. 사진가들은 카메라를 메고 달려가는데 설악산은 늦더위 탓인지 아직 제대로 채비를 차리지 않았다. 이런 아쉬움을 만회하기라도 하는 듯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쫓는 사진가들의 열정은 불꽃을 튀긴다.
사진동호회원 서른 여 명이 강원도 속초, 고성 지역으로 피정 겸 사진 촬영에 나섰다. 아침 8시도 되지 않은 시각임에도 올림픽도로에서부터 거북이 걸음이다.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에 이 정도의 불편은 감내해야 하는가 싶다. 가평휴게소에 들렀더니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출입문을 훌쩍 벗어나 족히 스무 걸음 이상 이어졌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커피 한잔을 들고 버스에 올랐으나 시원하게 달릴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10월 끝자락이라 강원도 산골의 단풍이 제대로 물들었을 것 같은 생각에 괜찮은 사진을 몇 장 건지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만선의 꿈에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떠나는 어부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속초로 접어들자 설악산의 봉우리들이 이제야 색동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채비를 하고 안개 속에서 살며시 얼굴을 드러낸다. 마치 산골 소녀가 도회지 손님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보인다. 수줍어하는 자태가 활짝 드러낸 얼굴보다 더 신비로워 눈길을 당긴다. 빛이 쏟아질 때보다 흐릿한 풍경이 오히려 사진 촬영하기에는 매력적임을 설악산도 아는 듯하다. 이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달리는 버스 안이라 안타까울 뿐이다.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지나 피정의 집에 도착했다. 수녀님께서 환한 얼굴로 맞으며 앞마당이 동해요. 뒤 뜰은 설악산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겸연쩍은 미소 속에 속초의 순수함이 배어 나온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보니 자연에 동화되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유명한 지관이 아니라 해도 이런 곳이라면 천하의 명당이라 하지 않겠는가. 피정의 집 뒷동산에 오르자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잔잔히 출렁이는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설악산의 준봉들이 손에 닿을 듯하다. 절묘하다. 20여 년 전에 이런 곳에 터를 잡았다니.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안식처로 이 땅을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닐까. 온갖 상념으로 찌든 내 마음부터 정화할 기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바로 옆에는 '방문객 전국 1위 카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자랑할 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성은 우리나라의 최북단지역임에도 많은 이들이 이곳까지 찾아온다니. 동해의 푸른 공기를 들이키며 커피 한잔을 즐기다 보면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무거운 덩어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갈 것만 같다.
바닷가로 가 보자고 보채는 발걸음에 이끌려 공현진항 수뭇개바위 부근으로 나갔다. 태양은 흐릿한 구름에 가린 데다, 설악산을 넘느라 힘들었는지 잠깐 하늘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다 바닷가를 어둠에 잠기게 한다. 잔뜩 기대를 걸고 기다리는 사진가들을 전혀 고려치 않는 태양이 야속할 뿐이다.
다음날 새벽 다섯 시 반에 카메라를 챙겨 어둠이 깔린 바닷가로 나섰다. 아직 온 세상은 먹물을 뿌려 놓은 것 같다. 포구에 하나둘 켜진 가로등과 앞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싸늘한 공기를 가른다. 두툼한 잠바를 걸친 회원들이 카메라를 들고 하나둘 나타난다. 따뜻한 이불의 유혹을 걷어차고 어둠 속의 빛을 쫓아 나온 이들을 보자 ‘일찍 일어나는 자는 하루를 두 번 산다.’라는 독일 속담이 떠오른다. 빛을 사냥하려는 의지에 찬사가 절로 나온다. 사진은 결국 빛을 담는 예술이 아니겠는가. 십여 명 남짓의 새벽 사냥꾼들이 빛을 쫓아간다.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앞사람의 옆으로 자리를 잡는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손을 비비며 멋진 한 장을 찍으려는 의지가 어둠을 뚫고 빛난다. 빛을 향해 나란히 삼각대를 설치한 모습은 마치 목표물을 겨냥한 병사들이 전열을 맞추어 선 듯 단단하다. 연배 높은 선배들이 묵직한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에서 프로의 자세가 배어 나온다. 빛이 적은 곳에서 사진을 촬영하려면 삼각대가 필수임에도 무겁다는 생각에 카메라만 달랑 들고 이리저리 오가는 나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럽다. 기본자세가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책한다. 이번 출사에서 얻은 것은 바로 이 깨달음이다.
강원도에서의 피정과 출사는 단순한 사진 촬영만이 아니었다. 늦가을의 단풍과 동해를 배경으로 한 순간은 마음을 정화하고 자연의 순수한 모습 속으로 몰입하게 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빛을 쫓는 회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진에 대한 열정을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사진은 순간의 아름다움과 삶의 깊이를 담아내는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주의 형상과 열애 중인 이들, 깜깜함이 짙을수록 빛은 그들 편이 아닐는지. 모든 일에 있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깨우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