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기업들, 취임식 전후해 '줄대기' 나서
대관조직 정비, 트럼프 1기 출신 인사 요직 배치
탄핵 정국으로 정부 역할 한계…기업 개별 아웃리치 절박
1기보다 더욱 강력해진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우리 기업들도 분주해졌다. 탄핵 정국으로 우리 정부에 제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어지면서 각 기업별 아웃리치(대외협력)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재계에 따르면 주요 기업들은 한국시간으로 오는 21일 새벽 2시(미국시간 20일 정오)로 예정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을 전후해 새 정부의 유력 인사들과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국내 주요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트럼프 취임식에 100만달러(약 14억7000만원)를 기부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는 이를 계기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회동을 추진한다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과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은 취임식 전 만찬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측근들과 친분을 쌓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과 관련해 국내 기업인들 중 가장 주목받는 이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다. 그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뉴욕 JFK 국제공항을 거쳐 워싱턴DC로 이동해 현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정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이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트럼프 주니어와의 돈독한 친분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난달 중순에는 트럼프 주니어의 초청으로 트럼프의 자택이 있는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5박 6일간 체류하며 트럼프 당시 당선인과 처음 대면하기도 했다.
이번 체류 일정 중에도 정 회장은 트럼프 주니어의 소개로 미국의 주요 정‧재계 인사를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취임식은 물론 소수의 VIP만 참석할 수 있는 취임 축하 무도회에도 초청받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다질 기회가 생겼다.
미국통으로 유명한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풍산그룹 회장)도 트럼프 취임식에 초청받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류 회장은 부시 가문과 친분이 두터워 트럼프가 속한 미국 공화당으로의 아웃리치에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이커머스 업체 쿠팡의 모기업인 쿠팡Inc 창업자 김범석 의장도 트럼프 취임식과 만찬,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쿠팡Inc는 뉴욕증시에 상장돼 있다.
우오현 SM그룹 회장과 허영인 SPC그룹 회장도 한미친선협회 추천으로 취임식 초청장을 받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통상 미국 등 주요국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 기업들도 개별 아웃리치를 하지만, 총수들은 우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경제사절단에 참여하는 식으로 상대국 정상을 만난다”면서 “이번엔 탄핵정국으로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으니 기업들의 개별 아웃리치가 더 절박해졌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대비해 미국 내 대관조직을 재정비하고 현지 네트워크를 갖춘 인사들을 요직에 배치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연말 인사에서 미국 외교관 출신 성 김(Sung Kim) 사장을 싱크탱크 수장으로 영입했다. 성 김 사장은 부시 행정부부터 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핵심 요직을 역임했으며,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를 지냈었다. 현대차는 지난해 초 그를 고문역으로 영입했다가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사장으로 정식 영입했다.
현대차 사상 첫 외국인 CEO인 호세 무뇨스 사장의 임명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나온다. 무뇨스 사장은 대표이사 취임 이전 북미권역본부장을 맡았었다. 현대차그룹 합류 이전에는 닛산 북미법인장을 역임하는 등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SK그룹도 지난 연말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대비해 지경학 이슈 대응력을 높이는 인사를 단행한 바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 산하 연구기관에서 기후변화와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김필석 박사를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환경과학기술원장으로 영입하는 한편, 미국 무역대표부(USTR) 비서실장을 역임한 폴 딜레이니 부사장을 그룹 북미 대관 총괄로 선임했다.
LG그룹은 지난 2022년 영입한 조 헤이긴 LG워싱턴사무소장이 트럼프 2기 행정부 아웃리치에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지내며 트럼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인물이다.
그동안 LG워싱턴사무는 조 헤이긴 소장과 한국에서 파견된 소장이 공동으로 이끌어 왔으나, LG는 지난 연말 인사에서 조 헤이긴 소장의 단독 체제로 변경하며 힘을 실어줬다.
재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다, 특유의 독단적 성향도 여전해 대미 대관 업무도 한층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기브 앤 테이크니, 상호 윈-윈이니 하는 고상한 외교적 수사는 트럼프의 대화 방식이 아니다”면서 “도의적으로 뭐가 옳다 그르다 하는 식으로는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 바이든 정부와의 약속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어느 정도 규모로 미국에 투자했고, 그 대가로 어떤 혜택을 받기로 했는지는 ‘트럼프 스톰’의 파장을 줄이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어떻게 하는 게 미국 우선주의에 부합할지, 엄밀히 말하면 트럼프 본인(의 성과를 부각시키는 데)에 유리할지를 먼저 제시해야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면서 “그런 성향을 잘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왕이면 트럼프의 핵심 측근과 잘 통하는 인사가 대관 업무에 나서야 리스크 관리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