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공의(公義)나 대의(大義)에 기여치 못해
박 시장의 죽음이 생의 무게와 어울리는지, 사회적 비중에 적당한지 고려
인간의 존엄은 ‘필멸(必滅)의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흔한 것은 귀하지 않다. 귀한 것은 희소하다. 그래서 한번 뿐인 인생이 존엄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의미도 장대해진다. 한번 뿐인 인생에 죽음도 한번 뿐이기 때문이다. 한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죽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인류는 ‘장엄한 죽음’에 대한 미학을 발전시켜 왔다.
우리가 일제침탈에 항거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목숨을 끊어 투쟁한 황현과 유럽에서 ‘일제의 불법침탈’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자결한 이준 열사를 기리는 이유는 하나 뿐인 목숨을 더 큰 공의(公義)를 위해 기꺼이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왜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이순신을 숭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불멸이 된 것이다. 이런 경우가 매우 희소하기 때문에 귀히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너무 값없고 초라하다. 대의를 위해서는 고사하고,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귀하디귀한 목숨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한번 뿐인 죽음은 공의(公義)나 대의(大義)에 기여치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가해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의 계기가 되었다. 평생 ‘공익(公益)’을 이야기하던 이미지 좋은 정치인에게는 ‘최악의 죽음’이란 생각이 든다.
박 시장의 죽음을 보고 필자는 문득 과거 두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같은 혐의, 다른 대응’의 안희정 前충남지사의 경우다. 안 전지사가 ‘미투(Me Too)’로 온 나라를 흔들어 놓고 종적을 감춘 시기가 있었다. 이 뉴스가 전해졌을 때 필자는 시사토론프로 생방송 출연 중이었다. 필자는 “사정기관은 안 전지사의 신병을 빨리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극단적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나오는데 현 여권을 대표해 출연했던 상대토론자가 다가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안 전지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인이 못 된다’는 말과 함께였다. 고개를 갸웃했지만 상대가 그쪽과 더 가깝기 때문이 ‘알겠다’고 했다. 결과는 역시 그의 말대로였다. ‘잠적’은 수사와 법적대응 준비를 위해 시간벌기였다. ‘쓸데없는 우려’를 했던 나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당시는 ‘참 한심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지만, 박 시장의 선택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법적으로나마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목숨을 끊어 상황을 모면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상황’을 만들었다. 안희정 전지사를 고발했던 여비서가 동정을 받고 투사로 인정받았다면, 박 전시장을 고발한 여비서는 몹쓸 짓을 한 배은망덕 가해자가 된 것이다. 급기야 ‘2차 가해’에 시달리던 여비서가 박 시장 발인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극적인 반전이지만, 저질 삼류드라마다.
두 번째는 성완종 전의원의 죽음이다. 성 전 의원은 경남기업 회장이던 시절 자원개발 비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던 2015년 4월 북한산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이 예정된 날이었다. 숨진 채 발견된 그의 품에 남겨져 있던 메모는 ‘성완종 리스트’로 불리며 정치계에 큰 후폭풍을 일으켰다. 해당 메모엔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과 금액 등이 적혀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구명에 힘을 쓰다가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됐다. 그가 후원하고 교류했던 권력자들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절망한 그는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린 것이다. ‘소심한 복수’였는지 <성완종리스트>는 궁지에 몰린 생명체의 마지막 절규 같았다.
정황을 볼 때 박 시장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궁지에 몰려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 경우도 갑자기 벌어지진 일이 아니다. 피해자는 성추행이 지속된 4년 동안 내내 고민했고, 시청 비서실 상관과 가까운 지인, 그리고 이후 많은 유관기관에 하소연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 마지막 선택이 경찰에 가서 정식으로 고소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고소인 조사를 받던 날 박 시장이 홀로 산에 올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박 시장은 이 상황을 모두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측근들 중 이런 상황을 접하고 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법적 절차를 밟는 중에도 경찰은 청와대에 내용을 자세히 보고했다 한다. 이는 박 시장측에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박 시장측이 대응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 피해자의 시각이고 하소연이다. 상식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15일 나온 보도를 봐도 사전인지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이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과 비교한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가족의 비리를 감춰주기 위해 희생했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비통해 했고, 그를 몰아 붙였던 권력에 저항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문재인 정권이다. 그렇게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김학의 사건 때는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계속하라’고 지시하더니, 박 시장의 경우 ‘공소권없음’으로 종결하겠다고 한다. ‘내로남불’이라는 시대정신에 충실한 일관성 있는 태도다.
내년에 보궐선거가 시행된다. ‘소통령’이라 불리는 중요한 자리가 비었으니 당연히 채워야 한다. 그런데 여당의 당헌에는 자당 구성원의 귀책사유로 보궐이 발생했을 경우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만약 박 시장의 혐의가 입증되어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법리적으로는 후보를 추천할 수 없게 된다. 차기 대권을 고려할 때 절체절명의 위기가 된다. 물론 꼼수가 동원되겠지만 일단은 피곤해진다. 기획이나 강권이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박 시장의 죽음은 ‘감히 청하진 않지만 바라던 바(불감청고소원 不敢請固所願)’인 상황이다. 그래서 이해찬 대표는 ‘박 시장의 성범죄 혐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상식이하의 격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폭력 구설로 후보를 내기 힘든 상황’을 막기 위한 사전포석인 샘이다.
한 사람의 석연치 않은 죽음은 파장과 원한을 남긴다. 그 사람의 사회적 비중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죽음에도 신중해야 한다. 개인적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박 시장의 죽음이 그 생의 무게와 어울리는지, 그의 사회적 비중에 적당한 것인지... 두고두고 곱씹고 되새기게 될 것 같다. 적어도 내년 4월 보궐선거까지는 말이다.
글/김우석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