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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블랙코미디, X세대의 웃픈 현실 [양경미의 영화로 보는 세상]


입력 2024.10.12 10:48 수정 2024.10.12 10:48        데스크 (desk@dailian.co.kr)

영화 ‘페이퍼맨’

인간은 누구에게나 과거에 호시절과 전성기가 있었다. 일이 술술 잘 풀리며 젊고 안정된 직장, 돈과 명예를 얻으면서 큰 걱정 없이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나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영광만 회상하며 추억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미래를 위해 힘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개봉을 앞둔 영화 ‘페이퍼맨’은 잘 나갔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남들만큼만 살고 싶은 주인공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다.


한때 잘 나갔던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인목(곽진 분)은 허름한 집에서마저 강제 퇴거를 당하게 되자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다. 빛바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영광의 순간이 담긴 사진 한 장만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속세를 떠나려 하지만 출가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뼈 때리는 말을 듣게 된다. 정처 없이 떠돌던 인목은 박스를 줍는 할배(강태욱 분)와 지체장애자 기동(장현준 분) 그리고 까칠한 소녀 서연(강한나 분)과 함께 굴다리 밑 생활에 합류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노인들의 폐지 생태계에 뛰어들게 된다.


고령화의 그늘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거리에서 리어카에 위험스럽게 폐지를 싣고 다니거나 유모차같이 작은 수레에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영화 속 인목도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폐지를 팔아 소액의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국내 폐지의 15%를 담당하는 공장의 화재로 골판지 원지가 공급부족 현상을 야기시키면서 폐지가격이 상승하자 인목은 그 틈에 노인들의 폐지 생태계에 뛰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청년들도 짭짤한 수익으로 폐지를 싹쓸이로 수거하자 노인들은 하루아침에 수익원이 끊기게 된다.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들, 그들이 폐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안타까운 고령화의 그늘을 영화는 조명한다.


X세대의 고단한 삶을 코미디로 녹여냈다. 인목은 굴다리 아래에서 폐지로 종이집을 짓고 살면서 부실한 허리통증으로 다른 일을 찾을 여력도 없다. 이러한 인목의 모습은 1975년부터 1984년생들을 일컫는 X세대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X세대인 40세부터 50세까지의 평범한 직장인들은 조기퇴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인목의 후배가 던진 대사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의 돈을 뺏지 않고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영화는 인목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X세대 남성들의 애환을 코미디로 담아내고 있다.


생계형 블랙코미디로 독립영화 흥행의 뒤를 잇는다. 최근 극장가의 두드러진 특징은 대작영화의 부진과 독립영화의 약진이라는 것이다. 영화 ‘페이퍼맨’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음소희’ ‘너와나’ ‘괴인’과 함께 화제가 되었다. 다른 작품들이 이미 정식 개봉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페이퍼맨’은 16일 개봉을 앞두고 흥행에서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화는 충무로 신예 기모태 감독의 데뷔작으로 감독이 연출과 각본 그리고 출연까지 직접 하는 열의를 보였다. 생계형 블랙코미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한국 독립영화의 기대작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경제에도 화려한 전성기가 있었다. 고성장으로 일자리가 넘치면서 소득이 늘어나 모두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산업에서 중국의 기술력이 우리를 추월하면서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저성장국면으로 들어가면서 노인을 비롯한 X세대 그리고 청년들까지 모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2025년이면 65세 이상의 인구가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를 앞두고 노인빈곤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 우려된다. 영화 ‘페이퍼맨’은 고성장으로 화려했던 과거 전성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저성장의 그늘에서 고군분투하는 노인과 X세대 그리고 청년들의 애환과 고단한 삶을 조명하고 있다.


양경미 / 전)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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